처음 등단했을 때의 막막함을 기억한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시작 이후에는 그다음으로 가기 위한 선택과 걸음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특히 창작의 순간에서 매번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결정하는 일은 앞으로도 끝이 나지 않는 숙제가 될 것이 분명하다. 여기 이제 막 창작의 순간을 즐기며 앞으로 나아가는 이가 있다. 첫 만남에서 자신을 뇌병변장애를 가진 30대 여성이라고 소개했던 긔북이(정은지, 이하 긔북이) 작가를 만났다. 창작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약 2년. 지난날의 걸음에 대한 질문이자, 앞으로의 응원을 담아 인터뷰를 진행했다.

긔북이 도예모임 전시사진 Ⓒ 긔북이 제공
이번 호 온전의 주제는 ‘역량으로서의 장애 예술’입니다. 역량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힘’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주제를 ‘창작의 동력으로서’로 이해했어요. 동시에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는데요. 무언가를 창작하는 과정에서 창작자가 가진 정체성이 큰 힘을 발휘한다고 자주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님이 진행했던 작업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동력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인터뷰 전에 작가님의 작업을 둘러보니 여러 가지 작업을 진행하셨더라고요. 간단한 자기소개와 그간의 작업을 소개를 해주세요.
긔북이: 긔북이라고 합니다. 주로 전주에서 활동하며 인스타툰을 그리는 창작자 겸 기획자예요. 장애를 가지고 있고요. 놀기 위해 열심히 일합니다. 저속불도저 같달까요? (웃음)
올해 한 작업을 소개하자면 크게 두 가지에요. 전북콘텐츠창작랩에서 지원을 받아 농촌을 주제로 한 웹툰을 연재했어요. 이후에는 지원금을 통해 굿즈를 제작하기도 했고요. 그중에서는 종이 씨앗 화분이 가장 인기가 좋았어요. 다른 하나는 전북문화관광재단의 어울림 창작 지원사업을 통해 긔북이 도예 모임을 조직한 일이에요. 원데이 클래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연말에는 전시도 진행할 예정입니다. 두 사업 모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팀을 이뤄 진행했어요.
인스타툰 긔북이 Ⓒ 긔북이 제공
먼저 인스타툰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토끼와 거북이가 눈에 띄어요. 우리 모두 흔히 알고 있는 이야기죠. 굳이 토끼와 거북이를 캐릭터로 고르신 이유가 있을까요? 또, 인스타툰으로 창작활동을 시작하신 이유도 궁금해요.
긔북이: 창작을 시작하게 된 계기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느 겨울에 운동하던 때였어요. 저는 걸음이 무척 느리거든요? 문득 주변 사람들을 보니 토끼처럼 빠른 거예요. 그런데 나는 참 거북이 같다, 이런 생각을 하다 동화를 떠올렸어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보면 오만한 토끼가 방심했다가 거북이에게 지는 이야기잖아요? 그 이야기를 생각하다가 의문이 들었죠. 토끼랑 거북이가 꼭 경쟁 관계에 있어야 하나? 둘이 나란히 같이 갈 수는 없나? 그런 생각이요. 그래서 인스타툰의 거북이는 저고, 토끼는 주변의 사람들이에요. 친구가 느리더라도 토끼는 거북이를 좋아할 수도 있잖아요. 각자의 속도와 상관없이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인스타툰을 시작하게 됐죠.
인스타툰을 한 계기는 단순해요. 요즘 사람들 시간 내기가 어렵잖아요. 동영상도 짧게, 글도 짧게 보죠. 쉽게 접할 수 있는, 간단하게 볼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어요. 간단하게 필요한 내용과 그림만 넣은 디자인을 활용하고 싶기도 했고요. 그렇게 만든 이야기로 제 삶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제 삶이 비장애인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주변 사람들과 도란도란 재미있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기획자의 면모도 많이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팀을 이루고, 새로운 사업들에 도전하시는 이유도 궁금합니다.
긔북이: 저는 인스타툰도 저 혼자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일상적으로 만나고 교류하는 모든 주변인과 함께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게다가 인스타툰의 이야기 자체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우러져 사는 모습을 담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런 것들이 외부 활동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해요. 더불어 외부 활동을 오롯이 저 혼자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요. 앞서 말씀드린 굿즈 제작 후에 부스를 운영한다든지, 전시를 한다든지 하는 것들이요. 육체적인 활동에서 보조가 필요해요. 그러다 보니 여러 사람이 모이게 되고, 여러 가지 일을 벌일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함께 모여 있으면 이런저런 재밌는 생각들을 하게 되잖아요.
여러 사업을 도전하는 이유는 제 관심사가 다양하기 때문이에요. 제가 농업을 전공했거든요. 어릴 때 자란 곳은 완주고요. 그러다 보니 농업이나 지역, 청년에 대한 관심도 많아요. 한편으로 팀 작업을 시작한 건, 주변에 집에만 있는 친구들을 집 밖으로 꺼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나도 하는데 같이 하자!’ 이렇게 말하려고요. 제가 이렇게 분주하게 돌아다니면 다른 사람들도 용기나 동력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힘을 주고 싶었어요.
긔북이 도예모임 작업 사진 Ⓒ 긔북이 제공
방향성과 의도가 확실하신 것 같아요. 협업하는 일이 작가님의 작업에 큰 기준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계획도 있으실 것 같아요. 아주 먼 미래의 계획도 좋아요. 해보고 싶으신 작업이나 기획이 있으신가요?
긔북이: 오늘날의 기준에서 모든 장애를 한데 묶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어요. 각각의 장애인이 외부 활동에 가진 어려움의 정도도 모두 다를 거고요. 저는 이동에 불편이 있는 장애인들을 위해서 창작활동을 해보거나 지원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들어보는 것이 꿈이에요. 굳이 형태를 따지자면 온라인 플랫폼의 형태로요. 각자의 지역이나 삶에서 추출한 콘텐츠를 가지고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어요. 여가 생활 겸, 약간의 수익 활동도 도울 수 있고요. 굳이 온라인 플랫폼인 이유는 집에서도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저도 대부분의 일을 재택근무로 처리하거든요. 아주 나중의 일이겠지만 그런 일도 해보고 싶어요.
주변에 다른 사람들, 예비 장애 예술인들과 함께하고 싶으시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해주신 것이 인상적이에요. 긔북이 인스타툰의 주제와도 계속해서 일맥하는 것 같고요. 그렇게 형성된 문장이 긔북이 작가님의 활동에 큰 중심 맥이 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을까요?
긔북이: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먼저 활동하면서 느낀 아쉬움을 한 가지 말하고 싶어요. 지자체 곳곳에서 여러 지원사업이 있기는 하지만 아카데미 형태의 사업들은 조금 부족한 것 같아요. 창작을 시작했거나 방법을 안다면 참여해 볼 수 있는 사업들은 더러 있지만 아예 시작하는 방법조차 모르는 경우에는 막막할 것 같거든요. 예를 들면 발달장애인의 경우에는 별도의 교육과정이 필요하기도 하고요. 그런 것들에 대한 고려도 많아지면 좋겠어요. 시작과 배움의 기회가 조금 더 넓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 가지는 창작을 시작할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인데요. 작은 아이디어도 시작하는 데는 큰 힘이 되니까 주저하지 말고 시작해 보면 좋겠어요. 그게 삶의 큰 빛이 될 수도 있고요. 앞서 한 말과 비슷한 이야기지만 제가 어떤 사례가 되면 좋겠어요. 지역에서, 전주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다른 사람들의 시작에 용기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