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에 앉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창문을 여는 일이다. 창문은 총 세 겹. 건물 밖의 유리창과 건물 안의 덧창 그리고 세상과 나를 경계 짓는 창문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두 눈이다. 내가 여는 것은 덧창이다. 덧창을 열며 두 눈도 함께 연다.”
방우리 소설 「창문을 여는 일」 중에서
소설가 방우리의 작품발표회가 지난 11월 21일 오후 전주 서노송동의 책방 물결서사에서 열렸다. 어느 해보다 바짝 다가온 겨울, 매서운 날씨였지만 하나둘 옹기종기 모인 관객들 덕분에 자리는 금세 따뜻해졌다. ‘그래도 우리의 나날’이라는 제목을 화면에 띄운 작가는 “내년 상반기 단편소설집 출간을 앞두고 티저 낭독회를 먼저 열게 됐다”며 운을 뗐다. 전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2013년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2014년 제2회 김승옥 문학상 신인상 대상을 수상한 뒤, 외부에 소설을 발표하지 않고 오랜 시간 홀로 습작하며 작품을 쌓아왔다.
2021년 12월 전주 서노송예술촌 뜻밖의미술관에서 김연경(서양화가)·송은채(싱어송라이터)·앙상블이내(음악가)와 협업 전시에 참여해 문학 안팎으로 시야를 넓혀온 방우리 소설가 Ⓒ임주아 제공
“꿈이 빠져나간 꿈의 자리에 서 있는 듯 얼떨떨하다”며 “의심과 불안과 좌절, 열패감 속에서 방황하는 숱한 나날의 시간이 없었다면 오늘과 같은 출발선에 서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작가는 꿈의 자리에서 출발선을 지나 묵묵히 자기만의 길을 걸어왔다. 프리랜서로 다채로운 글을 쓰며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를 넘나들고 이곳과 그곳의 경험을 두루 쌓아왔다. 2020년부터는 전주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다양한 장르 예술가들과 협업하며 문학 안팎으로 시야를 넓혔다. 2022년엔 극작가·비보이·성악가 등 동료 청년예술가들과 유료 메일링 연재 프로젝트를 통해 구독자를 모아 매주 소설을 연재하기도 했다.
점차 확장하는 시도를 게을리하지 않은 창작 생활 중, 올해 3월 전주 신진예술가 지원사업 공고문에서 ‘지원 대상 등단 10년 이내’라는 조건을 보게 된 것은 인생에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됐다. 2023년이 이 사업을 쓸 수 있는 마지막 해라는 사실, 더는 작품집 출간을 유예할 수 없다는 마음이 동시에 동했다. 등단 여부나 햇수와 관계없이 첫 책은 먼일이라 생각했으나 우연히 중요한 계기를 맞닥뜨리면서 언젠가의 계획을 바로 앞으로 당기게 된 것이다. 특히 방우리 작가는 전주 신진예술가 지원사업이 시행된 이래 역대 최초로 선정된 문학 작가라 여러모로 특별한 ‘처음’이라는 상징성을 갖게 됐다.
2023년 10년 차를 맞은 전주 신진예술가 지원사업에서 문학 분야 역대 최초 선정자가 된 방우리 소설가가 지난 11월 21일 오후 전주 서노송동 책방 물결서사에서 ‘그래도 우리의 나날’을 주제로 작품발표회를 열고 있다. Ⓒ김종선 제공
그래서인지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그는 등단작 ‘이사’를 비롯해 ‘창문을 여는 일’ ‘낙원멘션’ ‘나는 오늘도 유리벽을 넘지 못했다’ ‘최소화의 순간’ ‘행갈이’ 등 6편의 미발표 단편을 물 샐 틈 없이 선보였다. 현역 작가들도 책이 출간되기 전 행사를 갖는 일은 이례적이라 그럴만한 기획이 필요한데 신인 작가인 방우리 소설가는 과연 이번 발표회를 어떻게 엮고 풀어낼지 자못 궁금했다. 그에게는 첫 독자나 다름없는 참여자들과 어떻게 호흡할지도 기대됐다.
“올해 완성한 ‘최소화의 순간’이라는 소설은 평범한 가족이 사소한 불운들을 겪으며 뜻밖의 상황에 놓이는 이야기에요. 교통사고와 실직, 그리고 실명까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불운을 통과해나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리고 싶었어요.”
방우리 작가는 준비한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해 소개한 뒤 소설 속 중요한 대목을 화면에 띄워 독자에게 읽어 달라 청했다. 책을 들고 있지 않지만 낭독자의 숨소리가 페이지를 넘기듯, 차분한 분위기 속 꽉 찬 긴장감이 돌았다. “글을 끌고 오는 길이 차근차근하면서 매몰차다”라는 윤성희 소설가의 김승옥 문학상 심사평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평범한 가족의 서사를 통해 상실과 상처의 징후, 문학을 통한 치유의 의미를 보여준다”라는 이번 신진예술가 지원사업 심사평도 떠올랐다. 어느덧 마지막 소설 ‘행갈이’의 낭독이 끝나자 숨죽여 듣던 독자들의 잔잔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이날 방우리 소설가는 ‘이사’ ‘창문을 여는 일’ ‘낙원멘션’ ‘나는 오늘도 유리벽을 넘지 못했다’ ‘최소화의 순간’ ‘행갈이’ 등 6편의 단편소설을 선보이고 소설 속 대목을 독자들과 함께 낭독했다. Ⓒ김종선 제공
영화 개봉 전 소수 인원만 초대해 VIP 상영회를 열 듯 이날 작품발표회도 그런 의미에서 희소성 있고 특별하게 느껴졌다. 이를 통해 작가는 미리 독자 반응을 살펴보며 추후 퇴고 방향에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독자는 출간 전 예고편을 깊이 있게 읽어보고 작가에게 직접 구체적인 창작과정도 들을 수 있어 여러모로 흥미로운 시간이 되었으리라 짐작한다.
소설 소개와 낭독 시간인 1부 ‘쓰고 고치는 나날’에 이어 2부 ‘미래진행형의 나날’에서는 그간 창작자로 살아오며 겪었던 우여곡절과 내년에 묶어낼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출판사에 소설을 투고하며 느낀 슬픔과 기쁨, 자전적인 이야기를 소설에 녹여낼 때 지켜야 할 마음, 일대일 멘토링을 받으며 돌아보게 된 창작의 태도 등을 작가가 편안하게 털어놓았다.
이후 질의응답 시간에선 소설에서 받은 감응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독자들에게서 기분 좋은 여운이 엿보였다. “빨리 책으로 읽고 싶다, 나오면 꼭 사보겠다”는 말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행사가 끝났음에도 독자들끼리 테이블에 모여 계속해서 소설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한 신진예술가가 2시간가량 소설 이야기와 낭독을 나눴을 뿐인데 “내 유년 이야기 같다”며 서로 기억을 나누고, “작가님이 읽어주신 장면에서 그 영화 생각이 났어요”하며 겹쳐진 순간을 불러오고, “직접 낭독해보니 소설이 더 잘 읽힌다”며 묵독과 다른 낭독의 고유한 힘을 느끼고, 책이 나오기도 전에 세대불문 적지 않은 팬까지 생겨나는 바람직한 문학 행사의 풍경이라니.
방우리 작가는 스스로를 느림보라 칭한다. 그래서 이번 전주 신진예술가 지원사업이 아니었다면 책 낼 용기를 얻기 어려웠을 거라 말한다. 이 사업이 복잡한 서류와 정산 절차 없이 활동에 집중할 수 있는 ‘무정산’인 점도 큰 장점이다. 프로필 사진부터 일대일 전문가 매칭까지 작가들에게 꼭 필요한 부분을 지원하는 점도 좋다. 전주시가 지원한 첫 신진 문학 작가의 첫 책이 나오는 만큼 사업 이후에도 관심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이러한 경험이 작가의 몸과 마음에 깊이 스며들어 계속 쓰는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전주에서 쓰는 이야기가 전주에서 가장 먼저 주목받았으면 좋겠다.
문학 작가들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팀이나 집단으로 작업하는 일도 거의 없고 미술이나 연극처럼 특정 공간에서 펼쳐지는 창작이 아니라 대관할 일도 없다. 갤러리에서 화가를 만나고 소극장에서 배우를 만날 수 있는 것과 달리, 청년 문학 작가는 책을 내기 전까진 저 깊은 수면 아래 흩어져 조용히 열을 내고 있다. 오직 텍스트로만 가능한 것이 문학이기에, 문학은 지면이 곧 무대이기에 더 많은 발표 창구와 공개 발판이 필요하다. 사적인 블로그에 무료로 창작물을 공개할 수도, 스스로 매번 유료 구독자를 모으기도 어려운 일. 앞으로 더 많은 문학 분야 신진예술가를 발견하고 발굴하려면 온라인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발표 지면이 생겨나야 한다. 그런 판이 필요하다.
아무쪼록 처음으로 탄생한 신진 문학 작가 방우리를 신호탄으로 계속 발전적인 논의가 오가며 등장할 다음 주자들을 기대한다. 어쨌든 묵묵하게, 매몰차게 쓰고 있는 문학작가들은 이번 신진예술가 지원사업을 눈여겨보며 내년에 쓸 서류를 놓치지 않을 것 같다. 오랜 덧창을 여는 마음으로, 첫 책을 만드는 마음으로.
약 2시간가량 촘촘하고 흥미롭게 이어진 작품발표회가 마무리되자 큰 박수를 치며 웃는 독자들과 방우리 소설가 Ⓒ김종선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