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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증명하여 얻는 것이 아닌 방식으로서의 후원을 상상하며
제3호 문화예술후원_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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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는 전주에서 벌어지는 예술 작업, 문화예술 현상, 예술가와 문화예술공간을 소개하고, 리뷰하는 코너입니다.

전주 문화예술의 면면을 관찰하고 기록합니다.

 

 

전주의 예술인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팝프렌즈 후원인분들에게…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서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배선희라고 합니다. 감사하게도 웹진 《온전》의 요청으로 전주문화재단에서 진행한 <팔복다복 음악회>를 관람하였고 이와 관련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우선, 당일 행사 준비로 몹시 바쁘셨을 텐데 낯선 방문객을 기꺼이 환대해주시고 따뜻하게 챙겨주신 전주문화재단의 김선정 팀장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어떤 글쓰기를 해야 할까 고민하던 끝에 저는, 그날 행사에서 뵀던 그리고 전주문화재단 CMS 계좌를 통해 매달 일정 금액을 후원하고 계신, 190여 명의 이팝프렌즈 후원인분들에게 보내고픈 편지를 한 통 써보려 합니다.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잘 정리하여 전할 수 있을지 조금은 두려움이 앞섭니다. 제가 놓치거나 실수한 게 있다면 언제든 알려주시고 정정해주세요. 편지를 읽고 설명이 부족하거나 궁금한 점 있으신 분은 이후 《온전》을 통하여 연락해 주시면 힘껏 답장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코로나가 극심한 이 상황에서 모두 안온하고 평온한 날들 보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팔복다복 음악회>의 간단한 리뷰 작성을 제안받았을 때 저는 최근에 알게 된 인쇄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제가 지금 하는 아르바이트는 이전에 했던 일에 비하면 제법 쉬운 편인데요. 인쇄물의 이미지와 주문 수량을 확인한 뒤 포장하는 일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전엔 주로 서비스업과 관련된 일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저는 꽤 힘이 센 편입니다만 여성이기 때문인지, 카페 서빙이나 호프집 서빙, 계산원, 행사도우미와 같은, 사람들을 직접 상대하고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일을 맡을 때가 많았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사람을 대하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만만치 않은 일이다 보니, 저는 최근에 시작한 이 일이 꽤 마음에 듭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한 뒤 주어진 업무를 정직하게 수행하기만 하면 약속된 금액을 고정적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오랜 시간 불안정한 프리랜서로 살아온 제게 몹시 안정감을 줍니다. 계속 병행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올겨울은 무사히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소 뜬금없이 제 아르바이트로 편지를 시작한 건 후원인분들에게, 예술인들이 보내는 겨울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소개하고 싶은 내용이 있어서입니다. ‘예술인들이 보내는 겨울’이라니. 이렇게 쓰고 보니 의도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인’과 ‘겨울’이라는 단어에 붙어있는 모종의 혐의를 떨치기가 어렵네요. 저부터도 혹독한 추위를 견디고 있는 궁핍하고 가난한 예술가의 모습이 스치고 마는 게 사실입니다.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이 편지는 절대로 예술인의 어려운 처지와 곤경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세요. 또한 이팝프렌즈의 후원인분들께서 예술인을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와 인상이 모두 다르듯, 저 역시 모든 예술인의 입장을 헤아리거나 대변할 수 없다는 것도 함께 밝힙니다. 그러한 한계와 다름을 생략하지 않은 채, 지금 우리의 교집합이 되는 ‘후원’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기쁘겠습니다.

 

그럼 다시 편지를 잇겠습니다.

 

이팝프렌즈 후원인분들은 지금쯤 어떤 연말을 보내고 계실지 문득 궁금합니다. 모쪼록 소중한 사람들 곁에서 수고한 한 해를 돌아보며 조금은 쉴 수 있는 연말을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거리 곳곳에서 들려오는 캐럴이며, 반짝이는 전구 불빛이며 가만히 있어도 여러 생각들이 물밀듯이 찾아오는 연말입니다. 예술인들도 이러한 분위기에 몸을 맡겨둔 채 조금은 편히 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한해살이에 가까운 예술인들은 이 겨울 동안 꼭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올 한 해 쉼 없이 달려온 작업을 마무리함과 동시에 내년에 추진해야 할 새로운 작업의 실천 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엔 제작비 마련의 일이 포함됩니다.

 

11월에서 12월쯤, 문화재단을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내년도 예술지원사업 공고가 올라옵니다. 평소 하고 싶던 작업을 틈틈이 구상하고 있던 예술인들은 이에 맞춰 각 사업이 요구하는 지원서를 쓰기 시작합니다. 지원서를 잘 쓰는 것은 생각보다 꽤 어렵습니다. 공고시기에 맞춰 제출해야 함은 당연하고 심의에 고려되는 내용들을 숙지하여, 하고자 하는 작업이 충분히 파악되도록 구체적이고 적확한 언어로 작성해야 합니다. 동시에 이 사업의 필요성과 향후 기대되는 바를 일목요연하게 밝혀야 합니다. 나아가 제출한 지원서가 심의를 통과하여 합격하기를 바라며 몇 개월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지원서 쓰기는 언어를 벼리는 과정을 통해 하고자 하는 작업을 보다 구체적으로 다듬는 일이 되기도 하겠으나, 개인적인 견해로는 합격이란 마지막 관문을 통과해야 의미를 얻게 되는 글쓰기라고 생각됩니다. 이 모든 건 공공의 지원금을 확보하여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으니까요.

 

불행히도 모두가 좋은 결과를 얻을 순 없습니다. 아무개는 붙고 아무개는 떨어집니다. 아무개는 공간도 빌리고 사람들을 모아서 연습을 진행하지만, 아무개는 자기 집을 연습실로 쓸 궁리를 하다가 올해의 작업을 포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예술인은 이 겨울, 지원서의 칸을 잘 채우기 위해 정말 노력합니다. 준비 기간이나 쓰는 방식 등은 모두 다르겠으나 최선을 다함에 있어서는 별반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모두, 본인을 포함하여 참여자들에게 최소한의 사례비라도 지급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작업하고 싶으니까요. 그러기 위해선 준비 여부를 떠나 자신의 잠재적 능력과 가능성을 가시적인 수치와 데이터로 증명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작업의 비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신뢰할만해야 합니다. 서류 너머의 심의위원들에게 인정받아야 합니다. 어쩌면 평소 품행은 단정하나 언행이 파격적이면 보다 더 도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농담입니다). 솔직한 심정은, 겨울과 함께 시작되는 이 지원서 시즌만큼은 찢어짐과 구김 없는 슈트를 입은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종이에 스스로를 써 내려갈 때만큼은요. 그런데 전 가끔 그게 잘 안 됩니다. 그럴 땐 마치 스스로가 전자레인지에서 윙-하고 돌아가는데 한참이 지나도 터지지 않는 옥수수 팝콘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빙 돌려서 말했습니다만 가끔은 답답하고 불편합니다. 한 해를 끝마치자마자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기 위해 매해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이 글쓰기가요. 누군가는 떨어지고 누군가는 붙는 시스템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 아니 이 현실이요.

 

어째서 예술가는 매해 스스로의 능력 혹은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걸까요?

잠재적 능력과 가능성은 무엇을 근거로 판단되는 걸까요?

예술가의 ‘향후 기대효과’는 무엇에 부합해야 하는 걸까요?

혹시, 조금은 불안정하고 위태롭고 다소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는 예술인을 만나게 된다면 건네고 싶은 질문이 있으실까요? 그에게 바라는 대답이 있다면 그건 어떤 내용일까요?

한 번의 작업과 매 순간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예술인을 좀 더 오래 지켜볼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가 생긴다면 그를 통해 당신이 만나고 싶은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요?

예술인을 지원하는 것과 후원하는 것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한 예술인을 별의 궤도를 그리듯 지속적으로 살펴본다면 어떤 발견들이 가능할까요?

무조건적인 사랑 같은 방식의 후원도 가능할까요? 불가능하다면 그건 어째서일까요?

왜 많은 예술인이 “이젠 완전히 접었어.” 하며 다른 일을 시작하게 되는 걸까요?

그가 그만둔 것은 그의 능력이 부족해서일까요?

저는 왜 매해 겨울이면 이 모든 걸 다 그만두고 싶어지는 걸까요?

그건 제가 취약하고 건강하지 못해서 그런 걸까요?

정말, 그런 걸까요?

 

최근, 로베르트 발저라는 작가를 우연히 알게 된 후 그의 글과 생애에 관심이 생겨, 하인 양성학교에 입학한 야콥 폰 군테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벤야멘타 하인학교(문학동네, 홍길표 옮김)』와 그가 틈틈이 써 둔 산문을 모아 출간한 『산책자(한겨레출판, 배수아 옮김)』라는 두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저는 그의 글을 읽으며 “그의 문장은 의도적인 과장과 왜곡, 방어를 위한 냉소의 포즈, 기괴함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특징은 그가 쓰지 않은 것, 빈자리, 일부러 생략한 어휘, 다른 것으로 대치된 감정들, 입 다묾, 돌연한 마침이다. 그의 모든 것은 의외이다. 그의 글에서 아름다움이 넘실대는 것은 의외이다(산책자, p384).”라고 쓴 배수아 번역가의 감탄처럼, 그의 작품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그와 동시대 작가였던 헤르만 헤세는 “발저와 같은 작가가 지성을 주도한다면 이 세상에는 전쟁이란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작가가 수십만의 독자를 갖는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아질 것이다(산책자, p368).”라며 그를 호평하였고, 당시 비평가 로베르트 무질로부터 첫 단편집 『관찰』이 발저를 모방한 것처럼 보인다는 얘길 들었던 프란츠 카프카는 로베르트 발저의 열렬한 애독자임을 스스로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두 문인이 그의 재능과 능력을 알아보고 그의 글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였으나, 발저는 평생 인기 없는 작가로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다가 자살 시도의 실패 끝에, 스스로 정신병원을 찾아갑니다. 그렇게 절필한 채 30년 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해있던 로베르트 발저는 1956년 크리스마스 날, 눈 속에서 얼어붙은 시신으로 발견되며 생을 마감합니다. 그가 생전 즐겼던 산책길에 심장발작이 온 것입니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듯, 산문 『크리스마스 이야기』 중에서처럼(산책자, p381)”요.

 

“눈으로 덮인 채, 눈 속에 파묻힌 채 온화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자여. 비록 전망은 앙상했지만 그래도 생은 아름답지 않았는가.”

 

저는 한동안 이렇게 대단한 작가가 왜 그렇게까지 대중에게 외면받았는지, 왜 스스로 정신병원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사로잡혀있었습니다. 사실 답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쓸쓸한 삶을 살다가 운명한 예술가는 발저 외에도 정말 많았기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이 편지에 덧붙이진 않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점에 대한 언급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오랜 세월의 절필과 입원으로 사람들에게 거의 잊혀가던 발저를 지속적으로 만나 함께 산책하며 그의 작품을 재출간하기 위해 노력했던 출판인 카를 젤리히가 아니었더라면, 저는 아마 여러분들에게 로베르트 발저라는 작가를 소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를 끊임없이 호명하며 그의 작품과 세계를 세상에 알리려 애썼던 헤세와 카프카, 발터 벤야민과 같은 동료 작가들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아마 그에게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글을 최대한 작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을 우리가 오늘날 기억하고 그의 작품과 세계를 흠뻑 사랑할 수 있는 건, 그 긴 시간 동안 길을 이어준,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 덕분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전주의 예술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팝프렌즈 후원인분들께선 분명 전주를 기점으로 활동하는 예술인분들에게 그런 지지자가, 동료가, 협업자가, 친구가 되어 주실 것 같아 제 마음이 괜히 설렙니다.

늦봄, 흰 쌀밥을 뒤집어쓴 것 마냥 흰 꽃이 만개하여 흐드러진 이팝나무를,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기분이 두둑해지는 것처럼, 언제나 환한 웃음과 기쁘고 놀라운 일들이 가득하기를 멀리서나마 늘 응원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따뜻하고 풍요로운 연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ps. 담에 또 전주 놀러 갈게요! 초청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희 드림

#후원회 #이팝프렌즈 #팔복다복 음악회 #예술지원사업 #지원금 #벤야멘타 하인학교 #산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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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배선희
배선희는 1인 창작자 겸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그 외에도 작가, 기획, 연출, 작곡, 무용수 등 역할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 이미지와 포착되기 어려운 정동(情動)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최근 우울과 죽음 등 사회에서 터부시되는 감정과 사건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였다.
[인스타그램] @ssunheeee
[이메일] sunheebae8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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