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 모락모락 나는 백설기와 은은하게 내린 커피를 건네며, 그녀는 잔잔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때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죠. 결혼 후 남편 직장이 있는 낯선 곳으로 이주해 아이들을 키우며 가정을 꾸리지만, 자신에 대한 갈증을 느끼던 사람들이요.”
홍성미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경상도에서 아이를 키우며 예술에 대한 열망을 채울 길이 없어,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이 학교에 간 틈을 이용해 진주에서 군산을 오가며 동료 작가들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정신장애인들과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문득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친정 어머니의 아픈 손가락이었던 외삼촌이 그림 솜씨가 뛰어났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삼촌과의 작업이 시작되었다.
김지연 개인전〈99명의 포옹> 중 홍성미 작가를 찍은 사진
평화로이 맞닿은 세계
그녀의 삼촌 최춘기 작가는 평범한 직장인이었지만, 어느 날 마음의 문을 닫는 사건을 겪게 된 뒤, 사람들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문을 걸어 잠갔고, 이후 산속에서 지내며 자신을 고립시켰다. 홍성미 작가에게 최춘기 작가는 어린 시절 공원에서 사진을 찍고 놀아주던 멋진 삼촌이었지만,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삼촌은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작가를 맞았다. 홍성미 작가는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던 도중, 막내 이모가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그림을 잘 그리던 이모에게 그림을 그려달라 조르자 이모는 “춘기 삼촌이 나보다 더 잘 그려”라며 삼촌을 칭찬했던 기억이다. 당시 삼촌은 오랜 병원 생활을 마치고 젖소 농장에서 일하며 소를 돌봤고, 쉬는 시간에는 성경을 읽었고 나머지 시간에는 넋을 잃은 것처럼 보내고 있었다. 그런 삼촌에게 홍성미 작가는 그림을 권했다.
조카의 제안을 받은 뒤, 삼촌은 묵묵히 그림을 그려왔다. 그러던 삼촌이 군산에서 정신장애인들과 함께 하는 프로젝트의 전시 이야기를 듣자 흔쾌히 작품을 내겠다고 했다. 삼촌은 아주 오랜만에 많은 사람 앞에 나섰고, 딱 10년 전 열렸던 〈가까이 더 가까이〉 전시는 삼촌에게 매우 특별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최춘기 작가는 조카에게 “스케치북과 물감이 다 떨어졌어”와 같은 일상적인 이야기를 시작했고, 이후 그림은 최춘기 작가에게 치유의 도구가 되었다.
최춘기 작가의 작업은 십여 년간 이어졌다. 그는 종종 주변에 그림을 선물하거나 자기 생각을 적어 조카에게 건넸다. 책장의 여러 칸을 빼곡하게 채운 노트에는 세상을 향한 메시지와 조카를 향한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 온 세계 사람들의 사는 공간에 걸리고, 그들의 마음에 아름답게 남았으면 좋겠어.”
- 《최춘기 작가의 작업 노트》 중에서
홍성미 작가와 최춘기 작가가 함께하는 전시 〈같이 가치 있게〉가 2025년 1월에 열린다. 이 전시의 시작은 홍성미 작가의 〈멸종위기 동물 시리즈>를 본 최춘기 작가의 이야기에서 시작됐다. “네가 귀엽고 예쁜 동물을 좀 더 많이 그리면 좋겠다. 나도 동물을 그리고 싶은데 잘 못 그려서 네가 더 많이 그리면 좋겠어. 동물 그림을 많이 남기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데 기여하는 것 아닐까.” 그 말에 영감을 받아 두 작가의 작업을 조화롭게 엮은 이번 전시가 열릴 수 있었다.
같이, 그리고 가치 있게
최춘기 작가는 자연의 풍경을 그린다. 단단하면서도 아름다운 암벽들로 이루어진 산, 하얗게 부서지며 맑은 옥빛 물을 쏟아 내는 폭포, 청청한 소나무 등 세상의 모진 풍상에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는 것들을 작품에 담아낸다. 작가는 자주 산에 오르지만, 그의 작품들 속 자연은 직접 보고 그린 풍경이라기 보다는 작가의 마음에 담은 자신만의 무릉도원 같다.
최춘기, 〈매향 시리즈〉, 2024
그는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과 애정은 깊다. 10년 넘게 그림을 그리며 자신만의 순수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 이번 전시 준비과정을 지켜본 조인호 미술사가는 “도무지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무위의 세계에서 거칠게 옹이 지며 구불거리는 검은 몸뚱이의 가지마다 흰 꽃들이 만발한 매화나무는 어둠으로부터 빛과 환희심을 희구하는 내적인 갈망을 담은 자신의 초상처럼 보인다”라고 언급했다.
홍성미, 〈어린 왕자의 눈물 시리즈〉 중, 〈코끼리〉(2022), 〈여우〉(2024)
홍성미 작가는 규격화된 종이나 캔버스 대신 버려진 나무판자나 폐기된 마스크, 쓸모없어진 프라이팬 등 다양한 재료를 바탕으로 사람과 우리가 사는 환경을 말한다. 재료나 주제에 대한 고민은 미술학도이던 시절부터 계속해왔으며, 아이를 기르고 살림을 하는 일상 속에서도 답을 찾아나간 결과다. 오래 두어 굳어버린 인스턴트커피나 팥 삶은 물로 물감을 만들고, 아이들과 수업하고 남은 유성펜, 페인트 등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녀는 “나는 엄마이자 전업 작가다”라고 스스로를 표현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환경에 대한 관심은 필연적으로 커졌다.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 내가 버리는 것들이 오래도록 남아 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급변하는 자연환경을 보며 느낀 생각과 행동은 자연스럽게 〈멸종위기 동물들 시리즈〉로 이어졌다. 코로나19 팬데믹 시절에는 사용한 마스크를 엮어 다양한 사람들을 그려내며,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고 세상과의 연결을 표현하는 작업을 선보였다.
두 작가는 각자의 이상향과 평화로운 세계를 그리며, 서로 다른 듯 닮은 면들을 보여준다. 두 작가 모두 각기 다른 환경에서 생업을 이어가며 틈틈이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 서로의 작업을 비춰보는 동행자다. 그 특별한 관계가 앞으로도 오래 이어지길 바란다.
현재 홍성미, 최춘기 작가는 함께하는 전시 〈같이, 가치 있게〉를 준비 중이다. 완주문화재단의 전문예술창작지원으로 열리는 이 전시는 2025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전라북도 완주군 복합문화지구 누에아트홀에서 진행된다.
최춘기 작가의 전환점이 된 〈10th 사각지대 블루스〉 전도 10주년을 맞이해 군산 이당미술관에서 12월 7일부터 일주일간 진행된다. 이 전시는 단순히 장애가 있는 작가가 참여했다는 점으로 주목받길 원하지 않는다. 서로의 동료가 되어주며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듬는 작가들이 이야기를 전하고자 했다. 오늘도 시끄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순수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안내해주는 두 작가의 세상에 들어가 보길 추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