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사무실 앞 횡단보도 위를 걷고 있는 얼룩말. 신호에 걸린 차들 사이로 유유히 빠져나오는 얼룩말. 짬뽕 가게 앞에서 신기한 듯 바라보는 행인들과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어딘가를 향해 달리고 있는 얼룩말. 마침내 다세대 주택이 늘어선 좁은 골목에서 배달 기사와 마주하게 된 얼룩말. 얼마 전 어린이대공원을 나와 서울 시내를 배회한 얼룩말 세로가 남긴 사진과 영상으로부터 우리가 압도적으로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통제되지 않은 야생동물의 갑작스러운 출몰은 그 자체로 도시의 리듬을 정지시키고 초현실감, 즉 “고도의 있을 법하지 않음”1)을 자극한다.
아미타브 고시에 따르면 지구 온난화 시대의 기후 변화는 이 ‘있을 법하지 않음’의 세계로 가득하다.2) 그 속에서 우리는 정상이라고 가정되는 상태에 비추어볼 때 상당히 이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기상 이변들을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빈번히 경험하고 있다. 100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홍수, 끝이 안 보이는 것 같은 가뭄, 전례 없이 추운 겨울과 뜨거운 여름 등. 올봄을 역대 최악이라는 가뭄과 산불과 함께 하였다면 이제 그동안의 기록을 모두 갈아치운다 해도 놀랍지 않을 폭염을 앞두고 있다. 기상 이변이 더 이상 새롭지 않을 정도로 지구 온난화는 어느새 추상이 아닌 경험 가능한 현실이 되었다.
세로와 배달 기사(이미지 출처 :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전의령 제공
지구 온난화가 ‘있을 법하지 않음’의 빈도를 높여가며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면, ‘있을 법함’과 ‘있을 법하지 않음’이라는 이분법은 애초에 질서정연하게 존재하는 것으로서 자연과 그로부터 가능해지는 현실의 예측가능성이라는 근대적 안온감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근대적 세계관 속에서 비인간과 자연은 통제가능한 대상으로 존재하며 얼룩말 세로 사건으로 세간의 이목이 다시 집중된 동물원이라는 시설도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정복이라는 근대적 자신감을 표상한다. 다양한 동·생물 종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아놓은 동물원은 도시라는 근대적 공간 내에서 자연을 전시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재생산하는 대표적 시설로서 존재해 왔다. 이는 비인간에 대한 인간의 통제가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도시 속 동물원뿐만 아니라 20세기 이후 환경주의와 야생보호운동과 함께 등장한 동물보호구역이나 국립공원 같은 공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작게는 세로 소동, 크게는 기상 이변이 질서정연하고 예측가능한 근대적 자연관은 물론이거니와 노동과 생산의 규칙성으로 굴러가는 근대적 세계에 균열을 가하고 있다. 세로가 도시 속 야생동물에게 주어진 구역 밖을 나옴으로써 잠시 선사하는 초현실감, 또는 기상 이변이나 재난으로 상징되는 있을 법하지 않은 사건은 모두 우리 곁에 ‘있으나 잊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 새삼스레 알아차리게 해준다. 산, 강, 땅, 바다, 공기 등은 그냥 거기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살아 숨쉬며 물질대사하는 존재들이라는 사실 말이다.
인류세와 기후위기라는 당면 과제 속에서 최근의 학계와 문화예술계 등에서는 비인간을 생동하는 존재로서 새롭게 인식하고 그들의 행위성이 인간 행위성과 교차하고 얽히는 방식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행위자로서의 비인간이라는 관념 속에서 우리는 인간 활동의 배경이나 무대, 또는 자본주의적 이윤추구를 위해 무한정 전유가능한 자원이자 그 폐기물들을 처리할 하수구3)가 아닌 그 나름대로 역동적이며 유한한 존재로서 비인간을 인식한다.
이는 비인간, 동물, 자연도 존중 받아야 하는 생명이기 때문에 인간의 해침과 파괴로부터 보호돼야 한다는 종래의 환경주의나 동물권·동물보호운동과는 구분된다. 세로 사건을 예로 들자면 전자가 비인간 행위자로서 얼룩말이 동물원 밖을 나옴으로써 예기치 않은 사회적 여파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집중한다면 후자는 (실제로도 미디어와 SNS에서 또 한 번 불거졌듯이) 동물을 제대로 보호하지 않거나 가두고 억압할 뿐인 동물원과 인간 사회에 집중한다. 물론 두 관점이 확연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 더 나아가 기후 위기의 시대에 그 관계가 나아갈 방향이다.
기후위기와 자본주의(이미지 출처 : https://www.kboo.fm/media/69971-capitalism-vs-climate) Ⓒ전의령 제공
하지만, 인류세 시대의 새로운 인간-비인간 관계맺기란 당위성 속에서 위기의 시대를 낳은 충분히 실재적이고 물질적인 구조는 더욱더 간과되고 있는 듯하다. 습관적으로 대문자 인간(Human) 대 대문자 자연(Nature)을 내세우며 ‘인류’라는 거대하지만 모호한 대상에 생태 위기의 책임을 묻는 인류세의 상상력 속에서 이 위기가 사실상 자본주의, 제국주의, 가부장제의 역사적 얽힘 속에서 계급·인종·젠더 불평등은 물론이거니와 비인간의 수탈을 지속시킨 그 체제에 의해 가속화돼 왔다는 점은 효과적으로 지워진다.
낸시 프레이저는 지금의 위기를 단지 ‘환경적인 것’으로 축소시키는 것을 넘어서 자본주의 사회 구조가 낳은 총체적 위기로 볼 것을 제안한다.4) 자립이 불가능한 자본주의적 축적 체제는 임금 노동에 대한 착취뿐만 아니라 정치권력, 인종적 억압, 부불(否拂) 돌봄·재생산 노동, 비인간 자연의 수탈에 무임승차해 왔다. 지금의 위기는 그와 같은 축적 체제가 더 이상 지탱 불가능하다는 것을 드러내며 그런 의미에서 이는 경제적 위기이자 동시에 생태적 위기이며, 또 민주주의의 위기이자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라는 것이다.
세로가 빚어낸 소동, 빈번해진 기상 이변 등으로부터 더 이상 동물의 권리나 기후 위기만을 말할 때가 아니다. 이 사건들은 잔잔해 보이는 자본주의적 일상 자체가 지속불가능한 비현실성으로 연명하고 있었음을 상기시켜준다. 이제는 “부자들의 환경주의”5)를 넘어 생태, 노동, 돌봄, 민주주의 위기들이 어떻게 상호교차하는지 되돌아보고 반자본주의적 대항 정치를 다져볼 때다.
───────────────
1) 아미타브 고시, 『대혼란의 시대』 김흥옥 옮김, 에코 리브르, 2021, 41쪽
2) 같은 책
3) 낸시 프레이저, 『좌파의 길-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장석준 옮김, 서해문집, 2023, 158쪽
4) 같은 책
5) 같은 책, 1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