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穩全

닫기
통합검색
SITEMAP전체메뉴

에필로그

보통명사를 지우고 고유명사로 말하기
제11호 전주의 삶, 전주의 예술_2023년 12월
내용 SNS 공유 +


《온전》의 연재코너는 편집위원들의 이야기로 채워집니다.

2023년 네 번째는 연극평론가 김소연 님의 글입니다.

 



영화 <휴가>(이란희 감독, 2021)는 부당해고에 맞서 장기 투쟁을 벌이고 있는 해고노동자 재복의 이야기다. 영화는 5년간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에서 패소한 데에서 시작된다. 농성장 한편에 걸려있는 달력에는 연대 활동 등 일정이 빼곡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고, 막막함은 이 싸움을 함께 해온 노동자들 사이의 날 선 긴장을 만든다. 이때 노조위원장은 잠시 ‘휴가’를 갖자고 한다. 일터의 휴가가 아니라 투쟁의 휴가다. 재복은 농성장이 있는 강남에서 집이 있는 인천으로 돌아온다. 재복이 몇 달 만에 돌아온 집은 어지럽다. 싱크대 하수구는 막혀서 물이 흘러넘치기 직전이고 라면 용기 등등 쓰레기통도 넘치고 있다. 재복이 일터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싸우는 동안 두 딸 역시 어떻게 투쟁 같은 삶을 살아냈을지 짐작게 한다.


영화는 재복의 10일 간의 휴가로 전개되는데, 영화 내내 휴가가 끝나고 재복은 다시 농성장으로 돌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이 드라마를 끌고 간다. 복직투쟁은 막다른 상황에 놓여 있고 큰 아이는 이제 대학에 입학하면 집을 떠나야 한다. 아직 앳된 중학생인 둘째 아이 혼자 남는 것이다. 그리고 재복은 일터로 돌아가기 위한 싸움을 잠시 멈춘 지금 일을 시작한다. 큰 아이의 대학 예비등록금을 급히 마련해야 하고 작은 아이에게는 롱패딩도 사주고 싶다. 그저 ‘휴가’ 동안 급한 ‘돈’을 위해 시작한 목재가구공장에서는 계속 일할 것을 권유한다. 재복이 농성장으로 돌아가지 않을 이유는 차고 넘친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을 미리 이야기하자면 재복은 결국 농성장으로 돌아간다. 농성장으로 돌아갈 이유 역시 차고 넘치는 것이다. 투쟁의 막다른 상황에서 떠난 휴가가 다시 그를 노동 앞에 서게 하지만 그곳 역시 그를 밀어냈던 일터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 격렬한 갈등은 말 수가 적은 재복이 묵묵히 일하는 모습으로 전개된다. 농성장에서는 유인물을 나눠주고 서명을 받고 농성장을 정리하고 동료들을 위해 밥을 짓는다. 다시 일하게 된 목재가구공장에서 재복은 나무를 나르고, 자르고, 가구를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일이 끝나면 자투리 나무를 정리하고 톱밥을 쓸고 작업도구들을 가지런히 정돈한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재복은 또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밥을 짓는다. 재복이 들어설 때 집과 재복이 머물고 있는 집은, 화면으로 전해지는 것이지만, 온기가 다르다. 아빠가 차려둔 밥상을 외면하던 아이들이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재복이 끓이고 볶은 반찬들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이 놓인 작은 상에 함께 둘러 앉아 밥을 먹는다.


이 영화는 인천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업장 봄’에서 제작했다. 재복의 집, 재복이 돈을 구하기 위해 친구들과 만나는 술집, 재복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거리와 공장, 재복의 어린 동료가 살고있는 다세대 주택 등 강남 지하철 역 앞 농성장 외 대부분은 인천에서 촬영되었다. 그러나 영화는 ‘인천’이라는 장소를 두드러지게 드러내지 않는다. 재복이 농성장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과 급히 일자리를 구하는 재복이 오가고 있는 거리의 풍경에서 스쳐지나가는 구인광고 속의 ‘남동공단’이라는 작은 글씨 정도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곳곳에서 인천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영화가 드러내고 있는 삶의 구체성 때문이다.


‘작업장 봄’은 인천에서 연극과 영화를 넘나들면서 문화예술교육과 창작을 병행하고 있는 단체다. 인천 곳곳의 노인 복지관에서 어르신들과 연극반 활동을 하고 연말이면 5~10분 정도의 단막극 연작으로 공연을 올린다. 이 공연은 영상으로 제작되어 지역공동체 단체들과 함께하는 지역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한다. 지역영화제에서는 어르신, 청소년, 주민 등 다양한 동아리들이 만든 작품들이 상영된다. 때로는 어르신 배우들이 직접 무대 서기도 한다. 이렇게 지역에서 꾸준히 활동해온 작업장 봄의 시선이 영화에 구체성으로 담겨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농성장 가구공장만큼이나 재복의 집은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공간인데, 그만큼 재복의 집은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거의 근접촬영이다. 설거지하는 장면에서 재복의 등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가 하면 싱크대에 붙어 있는 간이 식탁에 마주 앉은 재복과 둘째 아이의 장면은 어느 한 편의 뒷통수가 클로즈업 한 다른 한편의 얼굴을 가리고 있기도 한다. 마치 카메라와 피사체의 거리를 제대로 조정하지 못한 화면처럼. 그런데 화면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 거리, 카메라와 피사체가 닿을 듯이 붙어 있는 거리는 재복과 아이들이 살고 있는 좁은 공간을, 그 좁은 공간에서 삶을 꾸려가고자 하는 세 식구의 안간힘을, 이 안간힘마저 위태롭게 하는 해고와 이 삶을 지켜내기 위한 끝도 없는 고단한 싸움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 <휴가>가 담고 있는 ‘인천’이란 서울에도 부산에도 대전에도 없는 인천만의 무엇이 아니다. 내 이웃의 구체적인 삶에 다가감으로써 ‘인천’을 드러낸다.


영화 <휴가>, 2021, 이란희 각본 감독, 작업장 봄 제작  Ⓒ김소연 제공


2011년 페스티벌 봄에서 공연된 오카다 토시키의 <핫페퍼, 에어컨, 그리고, 고별사>는 2009년 베를린 HAU극장에서 초연된 작품이다. 오카다 토시키는 일본을 대표하는 현대연극 연출가로 유럽 공연예술 신에서 주목받아왔다. 물론 이전에도 스즈키 다다시, 니나가와 유키오 등 주목받는 연출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카다 토시키 이전의 연출가들이 그리스비극, 셰익스피어 등 서구 고전을 일본의 전통공연양식으로 재해석한 연출로 주목을 끌었다면 오카다 토시키는 세 개의 분절된 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정규직, 비정규직, 강제된 사직 등 불안정한 노동을 그린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마치 저 멀리 ‘앞서’ 있는 유럽을 단숨에 따라잡은 것 같다고 할까. 이는 한편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공연예술 교류가 활발해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체계에서의 삶의 공통감 때문이기도 하다. 오히려 후자의 영향력이 더 크게 느껴졌던 것은 기존의 연극 형식을 파괴하는 실험적 방법론을 관통하는 것이 바로 현대사회의 ‘불안’이기 때문이다.


페스티벌 봄 2011, <핫페퍼, 에어컨, 그리고, 고별사> 오카다 토시키 작연출, 극단 첼피쉬  Ⓒ국립극단 아카이브


올해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 초청된 네덜란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구자하의 하마티아 3부작 중 <쿠쿠> 역시 그렇다. 한국에서 연극을 전공하다가 네덜란드로 유학을 가게 된 구자하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그려가는 이 작품의 타이틀 롤 ‘쿠쿠’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동명의 브랜드 전기밥솥이다. 무대 위에는 쿠쿠 전기밥솥이 세 대 놓여 있고, 구자하의 내러티브와 말하는 전기압력밥솥의 댓거리가 전개된다. 구자하는 90년대 말 IMF 관리체계 하에서의 한국 경제 전반에 가해진 가혹한 구조조정과 그 비용을 고스란히 치러야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젊은 아빠로 가족들을 건사해야 했던 친구에 대한 회고를 교차하면서 그려간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은 마치 압력을 과시하듯이 추를 달랑이며 김을 뿜어내는 쿠쿠가 만들어낸 밥을 구자하가 말없이 힘껏 눌러담는 것인데, 한국인에게 친숙한 소재로 한국사회를 그려가지만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계에서의 보편성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유럽 씬에서 활동하고 있는 구자하에 대한 주목은 아시아라는 타자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그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삶을 발견하게 되는 동시대성 때문일 것이다.


2023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쿠쿠>, 구자하 작연출  Ⓒ2023 SPAF 제공(촬영 : Sang Hoon Ok)


이 세 작품은 모두 장소성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들이 보여주는 장소성이란 다른 어느 곳에는 없는 이곳만의 특별함이 아니다. 나에게 없는 특별함이 아니라 나 역시 겪고 있는 보편성을 설득해내는 작품들인데, 바로 그 보편성이 나의 삶의 천착에서 비롯된다는 것, 장소란 삶의 구체적 현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문화예술정책에서 ‘지역’은 종종 지역의 삶을 타자화한다. 지역은 다른 장소와 구별되는 ‘특별함’으로만 불러나온다. 그 대표적 정책이 각종 ‘지역 브랜드’ 지원사업들이다. 그리고 종종 이러한 사업들이 역사문화콘텐츠 개발 사업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문제는 우리 지역에 이러한 특별한 역사적 경험이 있다는 데에서 멈추면서 과거의 재현에 머문다거나 다른 지역에 없는 무엇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랜드마크 사업들로 흐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내 삶의 장소를 타자에게 전시하는 데에 문화예술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정작 그 장소에서의 삶은 지워진 채 말이다.


이번 기획좌담에서는 지역담론을 비켜서서 심지어 ‘전주’마저도 지우고 참여자 개개인의 경험에 집중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보니 장소는 공간에 축적된 역사가 아닌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관계로 이해하고 설명하게 되는 것이다. 내 삶의 장소로서의 전주, 장소에 깃든 옛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삶으로 이어지는 생동하는 에너지에 대해 말한다. 결국 지금 여기의 구체적인 삶을 건져 올릴 때 장소는 재구성되는 것이며, 바로 예술이 해야 할 일은 이것이다.

#영화<휴가> #작업장 봄 #오카다 토시키 #삶의 구체성 #장소성 #나역시겪고있는보편성 #지역의삶
 섬네일 파일
필자 김소연
김소연은 연극평론가, [문화정책리뷰] 편집장이다. 좋은 공연을 함께 보기 위해 비평을 쓰고 잡지를 만든다. 이외에도 연극을 보는 다양한 방식을 궁리하고 실행한다. 극작가 리서치 워크숍, 삼인삼색 연출노트, 커뮤니티와 아트 등을 기획하고 진행했다. 공저 『세월호 이후의 한국연극』
[인스타그램] @sweetdream514
  • 최신기사순
  • 인기기사순
구독하기
전주문화재단에서 발행하는
웹진《온전》과 문화뉴스 클리핑 @파발을 정기적으로 받아 보세요!
구독 이벤트
웹진 《온전》 어떻게 보셨나요?
피드백을 남겨주시면 추첨을 통해 5천 원 상당 모바일 교환권을 드립니다.
55000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현무1길 20(경원동3가) T. 063-281-1563 F. 063-283-1201 E. jjcf_run9275@naver.com

발행처 : (재)전주문화재단 관리자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