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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제람, 제법 믿음직한 사람
제4호 예술과 브랜딩 그리고 문화창조자로서의 팬_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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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의 연재코너는 편집위원들의 이야기로 채워집니다.

2022년 첫 번째는 시각예술활동가 제람 님의 글입니다.

 



제람, 제주 사람


나는 제람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제주 사람’의 준말이다. 내가 제주에서 나고 자라기도 했지만, 그보다 내 정체성의 기반을 제주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70여 년 전 제주에서 있었던 ‘4.3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앙정부의 지시로 군과 경찰이 수만 명의 무고한 제주 사람을 죽였다. 그 당시 제주 사람 열 명 중 하나가 목숨을 잃었다는데, 내 가족도 ‘사건’이라는 말로 담아낼 수 없이 크고 깊은 비극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내 할머니도 죽음의 벌판으로 끌려갔다. 할머니를 비롯해 그곳에 영문도 모르고 내몰린 이들을 향해 총알이 난사됐다. 수많은 사람을 관통한 총알이 할머니를 비껴갔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할머니는 몇 년 후 내 어머니를 낳았다. 그날 운명의 총알이 내 할머니를 빗겨나지 않았다면 내가 존재할 수 없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일어난 일임에도 스스로 제주 4.3의 생존자라고 여기는 까닭이다.



제람, 제주 바람


할머니는 자신이 겪은 고통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4.3의 여파로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후 홀로 키운 자식들에게 행여 해가 되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픈 목소리를 낸다는 건 국가폭력에 저항한다는 의미이고 이는 곧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않는 군사 정부에 맞서는 행동으로 치부되기 십상인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을 거다. 결국 할머니는 아흔이 다 되어 세상을 떠나기 며칠을 앞두고서야 내게 토로했다. 할머니의 증언이 내게는 유언으로 다가왔다. 할머니가 외롭게 견딘 고통이 결코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몫의 불행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다루어야 할 문제이듯, 구조적인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수많은 작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내 작업과 활동으로 힘을 보태고 싶었다.


<You come in I come out>, 제람 강영훈  Ⓒ제람 강영훈 제공



제람, 제주 자람


대학원에 진학해 국가폭력으로 인한 집단 트라우마를 어떻게 시각예술로 다룰 수 있을지 살펴보는 연구를 했다. 그동안 제도권 교육을 받으며 사회 구조를 이해하고 그에 순응하는 훈련을 했다면, 대학원에 가서 비로소 역사적 맥락과 사회적 관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갈피를 잡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진정한 의미의 공부를 했다. 첫 실천으로 내가 겪은 국가폭력의 경험을 다루었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군복무 중 정신병원에 갇혀야 했던 고통을 설치 작업으로 드러냈다. 내가 마음을 열더라도 안전하다고 감각할 수 있는 물리적이면서 관계적인 공간을 마련해준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 한 사람의 증언으로 시작한 작업 ‘유컴인 아이컴아웃’(You come in I come out, 2018)은 해를 거듭할수록 증언의 수가 늘어 규모가 커졌고, 그만큼 ‘안전한 공간’이 확장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작업 제목을 ‘유컴인 위컴아웃’(You come in We come out, 2021)으로 바꿀 만큼 군복무 중 몇몇 성소수자 군인이 겪은 특수한 불행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한 남성 중심의 구조적인 폭력의 문제로 다양한 이들의 공감과 지지를 얻었다. 이 작업이 성소수자를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들이 겪은 서로의 아픔을 보듬는 차원의 연대를 이끌어냈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존재의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싶었다. 다양한 이들의 삶과 존재가 존중받는 사회로 가는 여정에서 요긴하게 활용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무지개색을 입힌 한글 최초의 전면 색상 서체, 길벗체를 만들었다. 성소수자를 비롯해 장애인, 이주민, 해고노동자, 난민, 여성 등 연대와 지지가 필요한 이들이 제 몫을 찾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현장에 길벗체가 ‘안전한 공간’의 상징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길벗체>, 제람 강영훈  Ⓒ제람 강영훈 제공


<길벗체 - 안전한 공간>, 제람 강영훈  Ⓒ제람 강영훈 제공



제람이랑


내 이야기를 작업으로 풀어낸 후, 다른 사람의 이야기까지 품을 넓혔다. 본국에서 일어난 전쟁을 피해 제주에 찾아온 예멘 사람들을 만났다.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기 어려워 ‘난민’인 그들과 친구가 되어 사귀며 관계 속에서 깨닫고 느낀 걸 공동체와 나누기 위해 다양한 방식의 작업과 활동으로 소통을 시도했다. 예멘 사람 암란과 대화하며 시작된 ‘난민은 누구이고 난민이 아닌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암란의 버스’(2019), ‘암란의 버스 2020’(2020), ‘암란의 버스 3’(2021)라는 이름의 영상을 연작으로 만들었다. 제주를 비롯해 전국 수십 곳이 넘는 지역을 방문하여 공동체 상영회를 열고 고민을 나누었다. 또 다른 예멘 사람 야스민과 제주 어린이들이 서로 알아갈 수 있는 기회로 삼으려 ‘야스민의 자전거’라는 이름의 워크숍 시리즈를 진행하고, 워크숍의 결과물을 활용해 같은 이름의 전시를 열기도 했다.


<암란의 버스 2020 – 제니>, 제람 강영훈  Ⓒ제람 강영훈



제람씨


그동안 내가 뿌리내린 좌표를 짚고, 만남과 연대를 이어가며 나아갈 방향을 따라 이랑을 팠다면, 이제는 내가 배우고 경험한 바를 기록하고 전하며 씨앗을 뿌릴 채비를 한다. ‘제람씨’라는 이름의 출판사를 설립해 내가 지속하는 작업과 활동을 책으로 펴내고 있다. 예멘 사람 암란과 야스민의 이야기를 한국어, 영어, 아랍어로 적은 그림책 『암란의 버스 | 야스민의 나라』(2020), 누구나 살면서 겪을 ‘어려움’이 서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출발해 3년간 ‘난민’을 알아가는 과정을 기록한 『암란의 버스 | 야스민의 자전거』(2021), 길벗체에 담긴 의미와 활용 예시 등을 정리한 『길벗체해례본』(2022) 등을 출간했다. 출판사 제람씨는 출간과 동시에 책값을 할인하는데다 유통과정에서 출판사에게 열악한 수익구조를 갖도록 하는 대형 온오프라인 서점에 책을 입고하지 않는다. 다양한 출판물이 제값을 받고 거래되고 소개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도서정가제를 지지한다. 지역의 작은 책방과 상생한다는 취지에서 제주의 독립 서점을 중심으로 책을 유통하며 제주 특산물이라고 홍보한다. 또, 제주에 있는 대학에서 시각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가르치는데, 수강생들의 졸업 이후 실질적인 삶을 고려하여 학기마다 주제를 정해 수업을 진행한다. 제주의 해양 생태계와 환경을 주제로 한 학기동안 작업해보도록 하기도 하고, 각자의 노동 경험을 작업으로 공유함과 동시에 노동자의 권리를 익혀 보다 많은 이들에게 전하는 작업을 하도록 독려했다.



제람, 제법 믿음직한 사람


나를 제주를 기반으로 하는 시각예술활동가라 소개하곤 한다. 시각적 표현 위주의 동시대 미술 작업을 하면서도, 작업에서 주로 다루는 다양한 이들의 삶의 현장에서 멀어지지 않으려고 두려운 마음으로 감히 활동가라는 호칭을 더했다. 내 작업과 활동의 목표는 누구나 자기답게 존재할 수 있는 물리적이면서 관계적인 ‘안전한 공간’을 만들고 넓히는 데 있다. ‘제람’이라는 이름을 많은 이들이 안전하고 믿음직스럽다 여길 수 있도록 차근차근 걸음을 이어가려고 한다.

#제람 #제주4.3사건 #시각예술 #길벗체 #암란의 버스 #제람씨 #시각예술활동가
 섬네일 파일
필자 제람 강영훈
제람 강영훈은 제주를 기반으로 하는 시각예술활동가로 작지만 의미 있는 이야기를 조명하여 누구나 자기답게 존재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다. 성소수자의 자긍심을 담은 한글 최초의 전면 색상 서체 ‘길벗체’를 만들었고,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군 복무 중 처벌과 감금 등 국가폭력을 경험한 이들의 증언을 담은 설치 및 출판 작업 ‘You come in We come out - Letters from asylum’, 제주에 온 예멘 사람들과 사귀어 배우고 경험한 바를 영상, 전시, 강연, 워크숍, 출판 등 다양한 형식의 작업으로 표현하여 관객/독자의 생애주기와 이해도에 맞는 소통을 시도하는 ‘암란의 버스’ 프로젝트를 지속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jera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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