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나를 저 먼 곳으로 안내할 것이다. 지금보다 더 멀리...
나에게 도서관은 해방구였다. 아주 작은 아이였을 땐 내가 살고 있는 동네가 온 세상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 나에게 도서관은 다른 세상이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던 특별한 공간으로 기억 속에 온전히 남아 있다. 조금 자랐을 때 서신동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10여 정거장을 지나 동완산동에 있는 완산도서관을 찾아가는 일은 모험과도 같았다.
도서관은 이상하리만큼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마치 동화책 속에서 종종 등장하던 높은 성처럼 말이다. 도서관을 기준으로 보자면 저만치 아래 버스정류장에 내려서 언덕을 오르고 꽤 많은 계단을 밟아야만 다다를 수 있었다. 어느새 나의 이마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다. 그런데 싫지 않았다. 나에게 새로운 자극을 줄 이야기를 펼쳐보기 전, 게임 속 주인공처럼 폭탄을 피하고, 속도를 내면서 단계를 끝냈다는 성취감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떨리는 두 다리를 붙잡고 입성한 자료열람실에선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귓가엔 사라락 사라락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꽂혔다. 오후 햇살이 비치는 도서관의 구석은 신비로웠다. 책장과 책장 사이를 오가며 책등을 살피고, 서가를 뚫어져라 탐색하며 마음을 움직이는 제목을 찾아보는 일은 놀이였다. 뜻밖의 보물을 발견했을 때 기쁨은 경험해 본 사람만 알 수 있다. 그러다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가 친구와 자판기 앞에서 캔커피를 나누는 일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기에 도서관은 소중한 추억이다.
그토록 좋아했던 도서관을 한동안 잊고 살았다. 바쁘기도 했지만, 즐길 것들도 많았던 세상 탓이다. 몸과 마음이 커질수록 할 일은 늘었고, 챙겨야 할 사람도 많았다. 회사도 가야 하고, 퇴근 후엔 영화도 봐야 하고, 가끔은 데이트도 해야 하고, 지인들과 술도 마셔야 했다. 이마에 주름살이 늘어가면서 가족은 늘었고, 오롯이 즐길 수 있었던 나만의 시간은 줄어들게 되었다. 언제 어디서나 편한 시간에 활용이 가능한 태블릿PC에는 이미 나만의 도서관이 만들어진 지 오래다. 누구보다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도서관은 내 기억 속에서 점점 지워져 가고 있었다.
Ⓒ김미진 사진 제공
그랬던 도서관이 다시 내게로 온 것은 최근의 일이다. 도서관은 초록의 옷을 입고서 나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전주에는 최근 특별한 도서관이 많이 생겼다. 각각의 도서관들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그 내용면에서는 매우 충실한 모습으로 시민과 관광객을 반기고 있다. 전주한옥마을과 전주역 첫 마중길, 덕진공원, 다가동에는 여행자를 위한 도서관이, 서학동예술마을에는 문화예술 관련 책만을 모아놓은 도서관이, 매해 국제그림책도서전이 열리는 팔복예술공장에는 이팝나무그림책도서관이, 헌책방 골목이 있었던 동문거리에는 헌책과 만화책이 가득한 동문헌책도서관이 운영 중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숲속에 있는 도서관을 사랑한다. 숲속에서 만나는 책이라니! 초록의 나무로 둘러싸인 오두막 같은 도서관에서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다가 책 밖 현실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의 열쇠가 필요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건지산숲속작은도서관은 시끄럽고 복잡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한다. 2013년 문을 연 이곳엔 등산을 하거나 숲을 산책하다 들려 편안하게 책 한 권을 읽고 갈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코스는 전북 연극의 중흥기를 이끈 박동화 동상이 세워져 있는 곳에서 조경단을 지나 오르는 코스다. 등산이라 하기엔 약하고, 산책이라 하기엔 조금은 센 코스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그 코스를 지금은 아들과 가끔 동행한다. 몸의 건강과 정신의 건강을 모두 지켜낼 수 있어 일석이조다. 건지산숲속작은도서관에선 쭉쭉 뻗은 편백나무 숲이 파란 하늘에 그린 예쁜 하트를 조망할 수 있다는 사실! 이곳을 지키는 사서님께서 알려주신 꿀팁이다.
Ⓒ김미진 사진 제공
또 한곳의 특별한 숲속도서관으로는 시집만 모아놓은 학산숲속시집작은도서관이 있다. 평화동 맏내제와 학산이 어우러진 공간은 오두막처럼 지어져 쉼을 선물한다. 자연과 책방의 조화를 위해 주변 나무 한 그루도 베지 않고 조성한 도서관에는 마루가 있고, 다락이 있고, 아랫방이 있어 공간을 즐기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계단은 책을 읽는 벤치가 되어주기도 하고, 창밖으로 보이는 숲길과 풍경은 다정하고도 아름다워 누구나 한 편의 시를 짓게 만드는 재주를 부린다. 이곳에 도착한 누구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문학자판기에서 단어를 골라 오늘 나에게 주는 시 한 편을 출력해보는 일이다. 그 종이 한 장을 소중하게 가슴에 품고 일주일을 한 번 잘 살아가보자고 힘을 내본다.
그래서 나는 전주가 좋다. 다양한 이색도서관이 곳곳에 숨어있고, 책 속에 스며들 수 있는 도시 분위기가 있어 사랑스럽다. 물론 이러한 도시 분위기가 몇 곳의 인스타용 도서관과 리모델링 도서관이 있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주가 지닌 문화의 힘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랜 시간 켜켜이 쌓아온 서예, 음식, 판소리, 완판본 등 문화자원이 풍부한 도시가 바로 전주다. 조선시대 전국 한지의 40%가량을 생산했다는 보고도 있고, 조선왕조가 전국 4곳에 나눠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 중 전주사고본만 유일하게 전란의 화마를 면했던 역사적 사실도 있다. 이 땅엔 기록문화의 중요성을 깨우쳤던 선비들이 있었고, 누구보다 출판문화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완판본은 전주에서 간행된 국문 소설의 목판본을 말하는데, 조선 후기 성균관 유생들이 반대하고 관리며 양반들이 폄하했던 국문 소설책을 시중에 유통시켰던 전주 사람들의 당당함이야말로 책의 도시 전주를 만들 확실한 DNA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김미진 사진 제공
책의 도시 전주의 예찬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질풍노도의 시기 나를 품어 주었던 완산도서관이 이제 막 새 옷을 갈아입고 문을 연다. 우리 동네 서신도서관은 정보통신기술기반의 영어특화도서관으로 새 단장을 했다.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읽는 공간이 아니다. 동네 구석구석에 있는 도서관은 사람과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거점 공간이다. 내 인생을 바꿀 한 권의 책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의 장소이기도 하다. 미래의 주인공인 아이들이 상상력과 창의력, 모험심을 키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비록 나의 몸은 전주에 있지만, 책은 분명 나를 저 먼 곳으로 안내할 것이다. 지금보다 더 멀리, 시공간을 초월해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내게 가져다 줄 것이다. 도서관은 내게 그런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