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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제노사이드를 기리는 두 가지 길
제9호 알기, 느끼기, 움직이기_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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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전 아우슈비츠를 다녀온 일을 계기로 나는 제노사이드(국민적·인종적·민족적·종교적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대학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일하는 틈틈이 여행을 떠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노사이드와 관련된 장소가 있으면 가능한 한 꼭 일정에 넣으려고 했다. 그렇게 12년에 걸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사라예보와 모스타르,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와 투올슬렝 제노사이드 박물관, 칠레의 기억과 인권 박물관 및 아르헨티나의 오월 광장, 제주 4.3평화기념관과 북촌 너븐숭이 유적지, 그리고 아르메니아 예레반의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 기념관을 방문했다. 그렇다고 내가 비장하고 거창한 사명감이나 의무감으로 그런 여행을 해온 것은 아니다. 그저 다른 여행자들과 비슷한 일정 중에 하루나 이틀, 그도 안 되면 단 몇 시간이라도 할애해서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해보자는 정도의 마음이었다. 요즘에야 ‘다크투어’라는 말이 TV 프로그램 제목에도 쓰일 만큼 널리 알려졌지만, 그때는 여행을 시작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내가 하는 여행을 ‘다크투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뿐이다.


나 같은 평범한 여행자를 자발적 다크투어리스트로 바꿔놓은 것, 그것이 바로 기념관의 힘일 것이다. 나치의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관해 백 권의 책을 읽어도 느끼기 힘든 것을 아우슈비츠에 단 한 번 가보는 경험만으로 느낄 수 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물론 이 문장에서 핵심은 ‘안다’가 아니라 ‘느낀다’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나를 여기까지 이끈 것은 어떤 최초의 심상, 수북이 쌓인 낡은 물건들의 충격적인 이미지였다. 과거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였던 벽돌 건물들을 그대로 살린 아우슈비츠 박물관에는 우리가 이를테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보게 되는 것과 같은, 나치의 만행을 실감나게 재현한 디오라마나 마네킹들도,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극적인 영상도 없었다. 발소리와 이따금 사람들이 주고받는 나지막한 대화만 들릴 뿐 고요하기 그지없는 전시실에는, 그 대신 낮은 조도의 조명 아래 가스실 학살에 사용된 치클론B의 빈 깡통, 수용자들의 여행가방, 안경, 의족, 머리카락, 옷가지, 신발 등이 각각 수북이 쌓여 있었다. 1945년 1월 러시아군이 수용소를 해방할 당시 발견한 머리카락 2만 톤, 신발 11만 짝, 여행가방 3,800개(그중 2,100개에 주인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냄비와 프라이팬 12,000개, 의족과 치아교정기 470개, 줄무늬 의복 387벌 등의 일부다. 한때 이름과 생명을 가졌던 개개인의 일부이거나 소유물이었던 것들이 주검 대신 남은 것이다. 내가 본 여행가방 중에는 ‘프라하에서 온 마리 카프카’, ‘빈에서 온 클라라와 사라 포히트만’의 것도 있었다.


박물관에서 일반적으로 접하는 가지런한 전시물과 달리, 그 주인들의 운명을 증언하듯 마치 버려진 것처럼, 내던져진 것처럼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물건들은 ‘실재’로서 그 어떤 ‘재현’보다도 강렬했다. 찢기고 헐고 망가진 사물들이 울부짖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충격에 사로잡혀 입을 막고 간신히 비명을 삼켰다. 그러나 따로 모아놓은 어린아이들의 옷가지를 보면서는 (아마도 전시 기획자들이 의도한 대로) 결국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우슈비츠의 경우 재현의 최소화와 예술의 소거(消去) 혹은 부재, 브레히트를 받은 아도르노식으로 쓰자면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일의 불가능성’이 역설적으로 이 기념관을 더 인상적으로, 강렬한 정서적 체험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 박물관  Ⓒ양재화 제공


그러나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제노사이드 기념관들을 보면 건축부터 그 안을 채우는 조형물까지 예술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제주4.3평화기념관에서 그 힘을 실감했다. 전시실 입구부터 범상치 않다. 4.3사건의 주요 피해 지역인 중산간지대 주민들이 토벌대를 피해 숨어들었던 동굴을 형상화한 길고 좁은 통로는 ‘역사의 동굴’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제주 설문대할망 설화를 바탕으로 4.3을 담는 그릇을 형상화했다고 하지만 아무리 봐도 비행접시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기념관의 외관과 그저 무슨 관공서를 연상시키는 차갑고 매끈한 로비를 보고는 도무지 몰입하기가 힘들었는데, 이 동굴이 산란한 정신을 다잡기에 적절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현재에서 과거로 가는 시간의 통로이자 이승의 사람과 저승의 사람을 연결해주는 다리 같았다.


수평의 공간인 동굴을 지나 한결 차분해진 마음으로 들어선 곳은 일순간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수직의 공간이다. 높다란 천장에 둥근 창이 나 있는 원형 공간에는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하얀 비석이 서 있는 대신 누워 있었다. 비석이라기보다 희생자들을 위한 관처럼 보였다.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뜻하는 백비(白碑)였다. 안내판에는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 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고 적혀 있었다. 천장에서 비스듬하게 떨어지는 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는 비석은 대단히 아름다우면서도 슬퍼 그 자체로 강렬한 심상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동굴에서 백비로 이어지는 공간이 이 기념관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한껏 감정을 고양시켜 몰입도를 높이고 그 뒤에 복잡한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는 방식은 영리한 전략이기도 하다.


          
제주4.3평화기념관의 전시실 입구 | 제주4.3평화기념관의 백비  Ⓒ양재화 제공


제주4.3평화기념관은 이밖에도 간단치 않은 4.3사건의 발단과 전개 과정을 설명하는 중간중간 관람객들의 정서적 환기를 위해 당시 상황을 모티브로 한 예술작품들을 곳곳에 배치해놓았다.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았고, 어떤 작품들은 자극적인 재현에 치중해 추모라는 본래 의미가 퇴색된 듯했지만, 그중에서 원형으로 된 홀의 윗부분을 빙 두른 강요배 화백의 대작 〈제주도민의 5.10〉은 단연 인상적이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단독선거 반대 운동을 펼치는 제주도민들과 무장대원들을 목가적인 배경으로 평화롭게 담아낸 이 그림에는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이들의 희망이 넘쳐흐른다. 전시실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그 이후의 참극과 대비를 이루어 더욱 가슴 아픈 장면이다. 제주4.3평화기념관이 이렇게 예술작품들을 과하다 싶을 만큼 전면에 내세운 것은 한편으로는 아우슈비츠와 달리 유물이랄 게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사건을 조금이라도 더 호소력 있게 전달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이기도 했을 것이다.


예술적 재현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방식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 아우슈비츠 박물관과 제주4.3평화기념관은 그 점에서 극명하게 대조를 이룸에도 둘 다 내 기억에 강렬하게 아로새겨졌다. 인간의 기억이란 믿을 수 없을 만큼 변덕스럽고 연약해서 오늘 아침 일도 깜박하는 것이 다반사다. <다크투어, 내 여행의 이름>을 쓰며 백여 가지의 책과 문헌을 읽고 참고했지만 이미 많은 내용이 희미해졌고, 시간이 더 흘렀을 때 그중 얼마나 내 머릿속에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에 수북하게 쌓인 희생자들의 물건들, 고요하게 누워 있던 흰 비석의 이미지만큼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고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제노사이드 #다크투어 #기념관 #전시 체험 #아우슈비츠 박물관 #제주4.3평화기념관 #제주도민의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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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양재화
양재화는 대학에서 언론정보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12년간 틈틈이 세계 제노사이드 현장과 기념관을 여행하고 이후 6년간 틈틈이 <다크투어, 내 여행의 이름>을 썼다.
[블로그] blog.naver.com/moodfor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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