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는 끝난 것인가? 물론 코로나는 ‘아직’의 시간 속에 있다. 하지만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되면서 코로나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다. 이제 코로나와 전시 관람 사이의 관계는 ‘때문에 안 간다’에서 ‘때문에 간다’로 변했다. 실제로 코로나로 인한 규제가 풀리면서 전시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세간의 관심 속에, 입에 오르내리는 전시는 전시장이 멀리 있거나 유료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몰린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코로나 사태로 외출을 자제하며 거리두기를 했던 게 불과 얼마 전이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흔히 전시라고 하면 미술 영역의 전시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오늘날 전시는 여러 영역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술의 영역은 물론이고, 예술과 대척점에 있다고 이야기되는 상업 공간에서도 전시라는 형식을 통해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팝업 스토어(Pop-up store)야말로 그런 전시 현상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신제품이나 새로운 브랜드의 출시에 맞춰 짧은 기간 동안 일시적으로 운영되던 팝업 스토어는 어느덧 단순한 매장이 아니라 기업의 가치나 철학을 알리는 전시 형식의 매체로 발전하고 있다.1)
<일상의 실천 10주년 전시> 무신사 테라스 홍대 Ⓒ오창섭 제공
이러한 상황에서 디자인 관련 전시의 증가도 눈여겨볼 만하다. 사실 디자인계에서는 디자인을 선보이는 매체로, 혹은 디자인 현상을 다루거나 관련 담론을 활성화하는 매체로 전시를 꾸준히 활용해 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여기에 자신을 알리거나 자신의 작업 논리를 드러내는 매체로 전시를 활용하는 디자이너들의 전시가 더해지고 있다. 이들은 예술의 언어를 받아들이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어쩌면 전시라는 형식이 그런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고 심화시키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한동안 예술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정체성을 확인받으려고 했던 디자인은 이제 예술과의 거리 좁히기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받으려 하는 것 같다.
최근에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성격의 디자인 전시는 2010년 전후부터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왜 그때였을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1997년 IMF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의 구조와 성격이 빠르게 변화하였고, 그 과정에 디자인 생태계 역시 달라졌다. 2010년 무렵에 이르자 사회를 지탱하던 이전 질서가 더는 유효하지 못하다는 게 분명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젊은 디자이너들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방식의 디자이너로 존재하기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회사에서 주어지는 디자인 일, 다시 말해 해야만 하는 디자인을 하는 게 아니라, 독립 디자이너로서 자신이 하고 싶은 디자인을 하겠다고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 전시나 잡지를 통해 그들이 본 해외 디자이너들의 모습은 그런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자극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 탄생한 새로운 디자이너들은 작가주의 디자이너라 불렸다. 작가주의 디자이너들은 전시를 그들의 놀이터로 생각하며 다양한 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2010년 이후 디자인 전시의 확산 이면에는 이런 작가주의 디자인 현상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2010년 무렵부터 전시를 찾는 이들도 늘어났다. 전시 관객의 증가 현상에는 매체의 변화가 하나의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스마트폰이야말로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2007년 1월 아이폰이 처음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한국에서 아이폰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로부터 3년이라는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한국에서 아이폰이 처음 판매된 것은 2009년 11월이었다. 2010년에 접어들면서 애플은 물론이고 삼성전자와 같은 국내 기업에서도 스마트폰을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스마트폰 시대가 열렸다. 스마트폰의 시대가 열리자 많은 게 변했다. 일하는 방식은 물론이고 사람을 만나는 방식, 여가를 보내는 방식이 변했다. 사람들은 작은 스마트폰에서 더 넓어진 세상을 만났다.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정보 기술의 발달은 세상을 가상(假象)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갔다. 새로운 매체에 의지하는 시간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사람들의 무의식 속 세상은 유령과 같은 것으로 자리했다. 그래서였을까? 실제적 경험이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경험이 중요하다, 경험을 확장해야 한다, 경험을 디자인하라 등등의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하나의 이야기가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그것이 이제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와 같은 현상일 수도 있다. 정의가 사라지고 있을 때 세상 사람들은 정의를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이야기했고, 자유가 억압받을 때 사람들은 자유를 더 많이 노래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2010년대에 접어들어 경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증가는 경험의 위기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경험의 위기는 삶이, 혹은 삶의 다양한 활동들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스크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으로 수렴해 버리는 진보(?)의 결과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전시 관람을 하나의 해방구로 받아들였다. 물론 그것이 유일한 해방구는 아니었겠지만, 잃어버린 실제적 경험을 전시 관람에서 찾았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더욱이 이 시기에 이르러 전시들은 더욱 풍성해졌다. 그런 전시들은 사람들의 반복적인, 그래서 무료한 일상을 비일상적 풍경들을 통해 식혀주었다. 사실 전시 경험은 작품의 확인, 혹은 정보의 습득이라기보다는 사건의 참여라는 의미를 띤다. 눈의 일이 아닌 몸의 일이라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관람이라는 표현으로 전시의 경험을 담아내는 건 어딘지 모르게 모자람이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관람은 시각이라는 감각이 전시 경험의 유일한, 혹은 우월한 매개라는 이해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표현은 전시 경험이 수동적인 행위라는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이후의 전시들은 점차 참여를 강조하는 흐름을 나타냈다. 그것은 세계의 요구에 대한 전시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오늘날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만지지 마시오’, 혹은 ‘눈으로만 보시오’는 더는 유효한 전시장의 문구가 아니다. 전시 경험은 보는 것만이 아니라, 만지고, 듣고, 향을 맡는 복합 감각적 실천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진달래 & 박우혁: 코스모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오창섭 제공
코로나로 거리두기가 실천되었던 지난 3년간 사람들은 가상의 세계에서 세상을 경험했다. 만남은 스크린에서의 일이었다. 코로나 이전까지만 해도 스크린을 통한 만남은 기술적 진보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신기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스크린을 통한 만남은 피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취해야만 하는 형식으로 그 의미가 바뀌었다. 돌이켜보면 코로나는 많은 걸 변화시켰다. 그리고 많은 것을 깨닫게 했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은 직접적인 만남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정보화 시대에 정보가 전부가 아님을 체험했다.
무엇보다 코로나 팬데믹은 사람들이 전시에 기대하는 게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스마트폰 화면을 통한다면, 혹은 인터넷으로 연결된 컴퓨터 스크린을 통한다면 보고자 하는 전시에 대한 온갖 내용을 자세한 설명, 고화질의 사진 이미지, 흥미로운 동영상 등으로 확인할 수 있다. 만일 전시가 정보 전달을 위한 매체라고 한다면, 그래서 전시를 찾는 게 정보를 확인하기 위한 활동이라고 한다면, 집에서 의자에 앉아 스크린을 보는 것만으로 전시 경험은 충분할 수 있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 동안은 물론이고, 지금도 그런 방식으로 전시를 경험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부족함을 느낀다. 이 결핍의 존재는 정보의 확인 이상의 무엇이 전시에, 혹은 전시장을 찾는 몸짓에 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그 결핍의 정체는 무엇일까?
<키키 스미스 - 자유낙하> 서울시립미술관 Ⓒ오창섭 제공
오늘날 사람들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코로나가 과거의 일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될지 아직 모른다. 사회의 변화도 너무 빨라 현기증이 날 정도다. 모든 게 유동적이고 불확실하다. 이런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시공간을 살아간다는 것은 불안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렇게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사람들, 정박지를 잃어버린 개인들은 불안한 현실에서 벗어나길 꿈꾼다. 그들은 절박하다. 그것이 비록 환상이라 할지라도 존재의 해상도를 높여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기꺼이 부여잡을 기세다.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 시간과 비용을 들이며 전시를 찾는 수고를 굳이 마다하지 않는 이유 이면에는 그런 존재 확인의 절박함이 자리하고 있다. 바로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전시를 찾아가 작품은 물론이고 그곳에 있는 자기 모습을 찍어 올리는 것이다. 그것은 전시의 경험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경험을 전시하는 움직임이다. 존재하고 있음을 선언하는 수행적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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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모든 팝업 스토어가 그런 흐름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팝업 스토어를 새로움을 만들어 내는 하나의 장치로 활용하는 백화점의 모습은 일시성이 불러오는 빠른 변화와 그로 인해 가시화되는 새로움에 주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