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희망이다. 아지랑이가 스멀거리면 황량한 들판에 푸른 싹이 올아오고, 남풍이 불기 시작하면 메마른 나무가지는 생명의 눈을 틔운다. 봄은 설레임이다. 꽃피는 계절이 다가오면 마음이 들썩거린다. 봄처녀보다 더 가슴을 두근거리며 2024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겨울동안 땀을 흘리며 희망과 설렘 속에 새 봄을 준비해 온 예술인들이다.
따뜻한 그림 속에 환경파괴라는 묵직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제작해 온 20대 화가, 올해 자신 인생의 전기가 될 전시회를 준비 중인 조각가, 무대와 관객의 경계를 허무는 참여형 작품에 꽂힌 연극인, 연주와 교육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은 국악인, 더 아름다운 멜로디로 지역주민과의 소통을 꿈꾸는 바이올리니스트 등.
이 계절 자신만의 빛깔로 꽃을 피워내고 싶은 사람들, 음악·미술·무용 등 각 분야에서 불꽃 같은 열정으로 주목 받는 5인의 스토리를 싣는다.
새싹 피우는 봄의 들판처럼 새롭고 실험적인 작품에 도전
- 서양화 엄수현

# 달도 높이 솟았구나-
둥근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르자 숲속의 동물들은 너도나도 구경을 나왔다. 개구쟁이 원숭이는 거꾸로 매달려 있고, 곰은 나뭇잎 속에 살짝 몸을 숨긴 채 달을 올려보고 있다. 앵무새는 긴 부리로 쫑알거리고, 코알라는 큰 눈을 껌벅거리고 있다.
그런데, 이를 어째. 귀염둥이 동물들이 매달린 나무의 밑둥이 잘려있네! 관람객들은 “나무가 쓰러지면 원숭이도 곰도 다치고 코알라도 아플 텐데…”하며 안타까운 한숨을 내쉰다.
#패러글라이딩-
맑은 하늘에서 동물들의 운동회라도 열린 듯하다. 코끼리는 낮달을 보면 미소 짓고, 바다거북은 여섯 친구들이 함께 멋진 스카이다이빙을 하고 있다. 엄마 얼룩말은 아기 말과 앉은 채 유유자적하게 하늘을 날고 있다.
다들 즐겁고 행복한 표정인데, 원숭이 한 마리가 잔뜩 겁에 질려 있다. 낙하산이 찢겨 바다로 추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원숭이 친구는 곧 물에 풍덩 빠질 것 같아”라며 울상을 짓는다.
서양화가 엄수현 씨의 그림은 따뜻하다. 파스텔톤 색감은 하늘과 바다, 숲을 부드럽게 터치하고 그림 속 동물들은 천진난만한 눈망울에 토실토실하고 사랑스럽다. 그러나 작품의 메시지는 절대 가볍지 않다. 인간의 탐욕과 무분별한 난개발로 인한 숲의 남벌, 바다의 오염, 생태계 파괴 등 묵직한 주제를 담고 있다. 기억 속의 놀이동산, 돌잔치, 보름달 등을 테마로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의 고통과 비애를 환기시켜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나’라고 묻는다.
2022년 교통미술관의 ‘청년 작가상’ 수상을 비롯해 개인전, 단체전 등 한시도 쉴 틈 없이 달려 온 이 청년 작가에게 2024년 봄은 설렘으로 다가온다며 올해 계획을 의욕적으로 펼쳐 보인다.
“이 봄은 ‘땅’ 소리 맞춰 힘차게 달려 나가고 싶어요. 겨울 동안 지나온 길을 성찰하고 리셋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앞으로 평면 작업 위주 틀을 깨고 조형물, 애니메이션 등 새롭고 실험적인 작품에도 과감하게 도전하고 싶어요”
전북도립미술관 ‘청년작가전’선정돼 설레임 가득한 출발
- 조각 홍경태

조각 홍경태 Ⓒ홍경태 제공
“올봄은 각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온 산하에 초록의 기운이 꿈틀거리듯 제 예술 인생에 굵은 획을 긋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 새로운 각오, 새로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조각가의 길로 접어든 지 벌써 20여 년, 홍경태 작가는 2024년 봄을 누구보다 뜨겁게 기다렸다. 전북도립미술관의 ‘2024년 청년작가’로 선정돼 오는 7월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 자락 입구에 있는 도립미술관에서 인생에 전환점이 될 개인전을 연다.
이를 위해 그는 지난겨울부터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다. 김제시 용지면에 자리 잡은 작업실에서 거의 매일 7~8시간씩, 많을 때는 10시간 이상 작품을 가다듬고 있다. 손에 용접 홀더를 들고 얼굴에는 용접 마스크를 쓴 채 조형물과 씨름을 하다 보면 한겨울에도 온몸은 땀으로 샤워를 하고 몸은 녹초가 되기 일쑤다.
홍 작가가 즐겨 다루는 소재는 너트. 엄지손톱만 한 너트를 이어 붙이고 채우는 작업을 집요하게 반복한다. 이 작은 소재를 부리다 보면 어느새 마법사처럼 그의 손끝에서 구름과 자동차, 집과 의자 등 형상이 빚어지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아 재탄생한다.
“육각형 너트는 형태적인 면에서 참 안정이 돼 있어요. 제가 의도하고 마음먹은 대로 형태를 구현해 낼 수 있는 맞춤 소재입니다. 의미론적으로 볼 때는 어디서든 필요하고, 무엇에든 잘 들어맞는 오브제이지요. 작업하면서 때로는 녹아 흘러내리기도 하고, 구멍이 뚫리는 불완전한 현상이 우리네 인간사회의 관계상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홍 작가는 누구나 쉽고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예술가가 되고 싶다. 무겁고 엄숙하며 근엄한 작품보다는 일상의 테마를 소재로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고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꿈꾼다. 관람객들에게 조각을 보는 즐거움, 예술 작품을 만나는 행복한 추억을 선물하고 싶다. 아이들도 거리낌 없이 다가와 만지고 체험하고 즐기는 작품을 오래도록 만들겠노라고 늘 다짐한다.
배우와 관객, 무대와 객석 경계를 넘어선 참여형 연극 지향
- 연극 신명수

“배우와 관객, 무대와 객석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함께 소통하고 같이 어울리는 작품을 만들고픈 꿈을 펼쳐 보이고 싶어요. 철학자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한 것처럼 ‘나는 연기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어디서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천생 연극인이 되는 게
평생의 꿈입니다.”
연극인 신명수 씨는 연기를 통해 관객들과 소통할 때 삶의 에너지가 분출하며 온몸에서 엔도르핀이 솟아나 자신이 살아 있음을 충만하게 느낀다.
그는 무대 주변에서 무엇이든 척척 해내는 팔방미인이다. 한때는 배우로, 또 필요할 때는 스태프로 뛰었다. 요즘은 연출가로, 또 극단 대표로 공연장 주변을 휘젓고 다닌다.
최근 심혈을 기울이는 작품은 ‘엄마의 카세트테이프’. 2년 전부터 연극의 기획, 연출을 맡아 땀을 흘리고 있다.
이 연극은 전주 팔복예술공장으로 거듭난 옛 전주공업단지 내 ‘소렉스 카세트테이프’ 공장의 역사와 그 안에서 일하던 근로자들의 땀과 눈물, 청춘의 기억을 담은 작품이다. 1970~1980년대 쉴 새 없이 기계를 돌리며 한때 수출산업 탑을 받을 정도로 잘 나가던 공장은 1992년 문을 닫았다. 20여 년간 버려지다시피 했던 공장은 도심재생사업에 의해 ‘전주팔복예술공장’이라는 문패를 걸고 재탄생했다. 갤러리, 공연장, 레지던스, 카페 등을 두루 갖춘 팔복예술공장은 ‘천년역사도시’ 전주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문화예술 콘텐츠로 자리잡았다. 국내외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타 지자체 공무원들도 벤치마킹의 모범사례로 찾는 ‘명소’로 떴다.
‘엄마의 카세트테이프’는 시민참여형 연극으로 안팎에서 화제를 모았다. 대본은 당시 공장에 근무했던 실제 직원들의 구술을 토대로 꾸몄다. 지역주민과 예술인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 작품을 만들고 같이 무대에 오르는 콜라보 형태의 작품이다. 무대 역시 한 곳에 갇히지 않고 팔복예술공장의 내외부 공간을 넘나든다. 관람객들이 배우들과 함께 이동하면서 작품을 만들어 가는 몰입형 연극이다. 이 작품은 5~6월 매주 토요일마다 상연한다.
현에 취한 인생, 이제는 동서양 융합하고 장르 어우러진 무대 꿈꿔
- 국악 국은예

“마음을 찡하게 울리는 현 소리에 취해 살다 보니 인생이 꿈결처럼 흘러간 것 같아요.”
해금연주자 국은예 씨는 삶의 희로애락과 다양한 무늬를 단 두 줄로 표현해 내는 악기의 매력에 빠져 살았노라 고백한다.
해금은 활로 현을 마찰시켜 소리는 내는 현악기이면서도 지속적인 음을 내는 관악기의 특징까지 갖춘 매력적인 전통악기다. 이 때문에 궁중음악부터 민간음악까지 널리 사용돼 왔다.
“봄이 어서 빨리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어요. 올해는 꽃샘추위가 유난히 심술을 부렸던 것 같아요. 한 해 농사를 잘 짓기 위해 낮고 어두운 곳에서 열심히 밭을 갈고 준비하며 기다리는 농부의 간절한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아요. 부지런히 공연 기획을 짜는 한편 동료들과의 연습에도 구슬땀을 흘렸습니다. 이런 노력이 가을의 알찬 수확처럼 좋은 결실로 이어질 거라 믿어요.”
국씨는 해금 연주자로, 국악강사로 분주하게 시간을 쪼개 쓴다.
우선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청소년들에게는 우리 음악, 우리 악기의 매력을 알리는 문화예술강사로 나가고 있다. 1주일에 3~4개 학교를 번갈아 뛰면서 국악을 가르치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동영상 숏폼이나 게임에 빠져 핸드폰에 코를 박고 생활하는 아이들에게 우리 전통음악의 아름다운 선율을 어떻게 맛보게 할 것인가를 늘 고민한다. 반짝 흥미를 넘어 지속적인 관심을 유도하는 것은 더 큰 숙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국악기 제작 체험 프로그램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짜내기도 한다.
연주활동에도 적극적이다. 해금, 아쟁, 신디, 드럼으로 구성된 실내악단 ‘국은예 에트(etre)’를 결성해 2018년부터 이끌고 있다. 전통 국악기만으로는 대중화에 한계가 뚜렷하고 변화의 흐름을 쫒기 어렵다고 판단해 동서양 악기의 융합을 시도했다. 퓨전음악, 재즈 등 공연을 통해 쉽고 편하게 다가가려는 노력에도 힘을 쏟고 있다. 최근에는 악기뿐만이 아니라 타 장르까지 한 무대에 올리는 실험을 하고 있다. 올해는 ‘태극기’를 테마로 한 작품을 구상 중이다. 무용과 실내악의 융합공연으로 가을쯤 첫 무대를 올릴 계획이다.
고유의 빛깔 지닌 봄꽃처럼 나만의 향기를 음악으로 표현 하고파
- 바이올린 신이나

“이제는 저 만의 색깔과 향기를 가진 음악을 해보고 싶어요. 클래식을 정형화 된 패턴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해석해 보려고 합니다.
창작음악의 신선함도 추구하고요. 아름다운 꽃들이 잔치를 펼치는 봄 들판으로 달려 나가고 싶어요.”
바이올리니스트 신이나 씨는 올 봄에 대한 기대와 꿈이 크다. 유치원생 때부터 활을 잡기 시작해 30여 년간 오케스트라가 주 활동 영역이었다.
올해부터는 ‘따로, 또 같이’ 공연을 통해 자신이 무대의 주인공으로 적극 나설 생각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관객들과의 접점을 늘려 나가는 데 주력할 계획이다.
우선 4월에 부산 동래의 ‘추억 몽글몽글 콘서트’를 시작으로 단독공연으로 전국 어디서든 불러 주는 곳이 있으면 멀고 가까운 것을 가리지 않고 달려갈 계획이다. 그동안 공연장, 축제 등 행사장을 다양하게 찾아 다녔다.
동료들과 함께 꾸린 ‘센티멘탈 로그’ 공연단에 대한 기대도 크다. 바이올린과 피아노, 아쟁, 가야금, 타악 등 전공자들과 소리·성악하는 친구 등 7명으로 구성을 했다.
자신의 이름과 기타리스트(이상욱)를 합성한 ‘신이 나는 기타리스트’ 활동도 추진한다. 월 1~2회 소극장 등을 찾아 클래식, K팝 등을 들려주고 한옥마을 등 길거리 버스킹 공연에도 도전할 생각이다.
‘찾아가는 학교 음악회’도 월 1회 이상 구상 중이다. 청소년들에게 음악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것도 하느님이 부여해 준 소명 중 하나라고 믿기 때문이다.
본업이라고 할 수 있는 클나무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주자로서의 활동도 소홀히 할 수 없다. 20여 명의 단원들과 함께 부안예술회관의 상주 단체로서 월 1회 지역주민을 위한 다양한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지역 예술교육 강사 활동에도 참여한다. 꿈다락 토요문화예술학교 등에서 아이들과 함께 음악교육을 물론, 악기 만들기, 영화 제작 등 예술놀이 활동을 펼친다.
“클래식 음악을 웅장한 공연장에서만 감상할 게 아니고 작은 동네, 골목 어귀 등에서도 멜로디가 흐르는 예술 토양을 만드는데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