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전주에 대한 이야기고, 전주 예술에 대한 이야기다. 매번 하는 이야기이고,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잘 알고 있나? 전주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하면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전주의 특별함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다른 지역에는 없고 전주에만 있는 것. 그런데 정말 전주란 그런 것일까? 그것만이 전주일까? 그래서 질문을 바꾸었다. 전주를 지우고 ‘지금’ ‘여기’의 삶과 예술에 대해 물었다. 그러고 나니 한 사람 한 사람의 시간과 공간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면서 올록볼록한 여러 색깔의 전주가 조금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당신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이야기이며, 전주의 이야기이고, 동시대 한국예술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11호 기획 좌담 Ⓒ엄준 제공
전주 토박이와 전주 토박이 아닌 예술가들의
전주에서 교차하는 작업 이야기
김소연(본지 편집위원, 이하 김소연) : 오늘 좌담은 ‘전주 창작지도 그리기’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전주’ ‘창작지도’ 이런 말들이 좀 거창한데, 그러다 보면 ‘나’를 지를 지우고 이야기하게 되는데 오늘은 다르게 진행해보고자 합니다. 전주도 지우고 예술도 지우고 ‘나’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마도 모신 분들의 이야기에서 ‘전주’도 ‘예술’도 지워질 수 없겠죠. 이야기를 밀도 있게 진행하기 위해 공연예술 분야 네 분의 창작자를 모셨습니다. 어떻게 입문하게 되었는지,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이야기는 서로 추임새를 넣고 댓거리를 하고 깔깔거리면서 진행되었지만 지면 관계상 추임새와 댓거리는 생략했다.)
송원(前 배우다컴퍼니 대표) Ⓒ엄준 제공
송원(前 배우다컴퍼니 대표, 이하 송원) : 저는 지금은 원도심이라고 부르는 남부시장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전주 토박이죠. 남부시장 사거리에서 할아버지가 큰 약국을 하셔서 시장 상인들과 늘 인사를 하고 서로 안부를 묻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대학은 광주에서 무용을 전공했는데 저랑 잘 안 맞아서 고민이었어요. 엄마 친구분이 “춤추고 노래하는 걸 좋아했으니 뮤지컬을 해보겠느냐”며 극단 명태를 소개해주셔서 2006년 대학 재학 중에 극단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광주에서 수업 끝나면 저녁에 전주에 있는 극단으로 출근했습니다. 재미있었어요. 자유롭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극단은 2010년 그만두었고, 2012년쯤 “내가 연극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뭐지?”라는 질문이 처음 들었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이 질문을 가지고 작업을 시작하면서 함께 하는 이들의 특징과 목소리에 집중하면서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처음엔 프로젝트팀이었고 지금은 배우다컴퍼니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최근 작업은 전주 원도심 옥상 프로젝트입니다. 전주 원도심과 연극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OTT 등 편하게 즐길거리가 많은 세상에서 연극이 놓인 자리와 신도시에 비해 매력이 없는 원도심을 나란히 보게 된 거죠. 원도심은 외면받는 지역이 되었어요. 원도심을 돌면서 낡은 건물의 옥상에서 연극을 하면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작년부터 공간을 찾고 공연하고 있습니다. 전주의 원도심에 극단이 많이 모여있어요. 한옥마을에서 반경 5km 정도가 도심인데, 보통 시내라고 불러요. 시내 나간다 하죠. 명태는 극장과 연습실이 시내에 있었죠. 하지만 저희 같은 신생팀들은 극장에 들어가기 어렵죠. 한국소리문화의전당 같은 극장은 저희가 대관하기에 너무 비싸요.
연극 <첨부파일_서식01_이력서> Ⓒ혜영 제공
김형택(고니아 대표, 이하 김형택) : 저도 토박이입니다. 초, 중, 고, 대학을 여기서 다 나왔어요. 음악으로 전공을 바꾸고 학교에 다시 가기는 했지만. 음악은 고등학교 때 친구들끼리 밴드를 만들고, 음악부 들어가서 통기타 동아리 활동하고 그러면서 시작했어요. 제가 활동하던 고등학교 밴드가 아직도 있어요. 음악은 하고 싶은데 집에서 워낙 반대가 심했죠. 다들 그렇잖아요. 원래 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집안의 반대가 심해서 어른들이 원하시는 공대 건축과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 당시에 인기 있고 취업이 잘 되는 학과였어요. 입학하는 해에 IMF가 왔고 취업했던 선배들도 취업이 취소되는 상황이 되었어요. 결론적으로 어른들의 권유로 가게 되었지만, 그 책임은 온전히 내가 지고 가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죠. 그래서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자고 생각하게 되었고,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서울재즈아카데미로 배우러 올라갔죠. 서울재즈아카데미 졸업하고, 그때는 실용음악과가 거의 없었어요. 다시 백제예대 들어가서 졸업하고 편입하고 대학원에 갔죠. 고니아는 2007년에 만들어서 2009년에 첫 앨범을 내고 정규 앨범 5장, 싱글 2장, OST 5개 정도 했습니다. 해외 투어도 다니고 국내에서도 공연하고 방송음악도 하고 있어요. 우리 활동이 꼭 전주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전주에 살고 있고 작업실도 전주에 있어요. 처음 밴드 시작할 땐 연습실 대여해서 했죠. 교회에서도 연습하고. 교회는 악기랑 앰프 등등이 다 있거든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전주문화재단에서 운영했던 시민놀이터에서 연습하기도 했어요. 지금은 저도 작업실이 있고 같은 팀 후배가 논산에 작업실이 있어서 거기서도 연습해요. 친구들 연습실을 빌리기도 하고. 보통 음반 작업을 하면 1년 정도 곡을 쓰고, 곡이 완성되면 합주하면서 편곡하고 녹음하죠. 앨범 내는 데 돈이 많이 들어요. 녹음실도 대관해야 하고 믹싱비도 들고. 1집, 2집, 3집은 전주에서 했는데 아는 형님이 많이 도와주셨죠. 4집은 부산에서, 5집은 서울에서 녹음했어요. 좀 다른 환경에서 만들어보고 싶었죠. 녹음 과정에서 엔지니어와의 소통이 중요하거든요. 재즈 음악을 잘 이해하는 엔지니어와 작업하고 싶었어요. 초청 공연이 많아서 서울, 대전, 세종, 공주 등등 여러 곳에서 해요. 3주 전에는 영국에서 공연했고, 작년에는 덴마크, 콜롬비아, 코스타리카에서 했고 다음 주에는 모로코 칠레 투어가 있어요. 내일은 한벽문화관에서 저희 팀 단독 콘서트를 해요. 팬층이 있는 밴드들은 소리문화의전당에서 공연하기도 하는데 대부분 소극장에서 하죠. ‘뮤지션’이라는 콘서트장이 있어서 거기서도 하고. 밴드 공연은 음향이 중요해요. 또 장르마다 원하는 것이 다르고. 그래서 소극장에서 하면 공연팀이 설비를 다 가지고 들어가죠. 4집 이후에 해외 공연에 대한 관심이 생겼는데 정보가 없었어요. 음악창작소 지원으로 멘토링을 받으면서 서울 뮤직위크, 울산 에이팜 등 뮤직마켓에 대해 알게 되고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죠. 초청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해외 음악시장을 겨냥한 음악적 전략이랄까 그런 것들을 준비하는 데에 뮤직마켓이 좋은 플랫폼이 되었어요. 한국적 음색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장구와 협연하는 곡을 만들고 있어요. 시행착오도 많고 앨범 내는 데 한 3년 정도 걸렸어요.
고니아 콘서트 <장단 위에 선율> 포스터 Ⓒ고니아 제공
2023 모로코 VISA FOR MUSIC | 고니아 칠레투어 발디비아 Ⓒ고니아 제공
박규현(前 창작극회 대표, 이하 박규현) : 저는 전주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어요. 전주에서 아르바이트하다가 우연히 극장에 가게 되었고 이거 재미있겠다 해서 연극을 시작했어요. 2002년쯤이었는데 창작소극장 밖에 활동을 안 하고 있었어요. 극장들, 극단들이 생겼다 없어졌다 부침이 있죠. 창작극회가 창작소극장을 운영했는데, 창작극회는 1961년에 박동화 선생님이 만드셨고 1990년 곽병창 대표께서 창작소극장을 만들었어요. 보통 극단은 설립자가 대표를 계속하는데 창작극회는 임기제예요. 제가 작년까지 대표를 했어요. 창작소극장은 동문거리에 있어요. 거기가 진짜 구도심인데 객사 앞으로 도로가 크게 뚫리면서 그쪽으로 다 옮겨가고 슬럼화가 되었다가 한옥마을이 다시 부상하면서 이곳도 활기가 조금 생겼죠. 아무튼 지금까지 전주 문화예술의 중심지 같은 곳이죠. 이 거리에도 여러 정책사업이 있었어요.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도시재생 등등 크고 작은 사업단이 와서 “이번에 저희가 이 동문거리를 살리려고 준비하고 있다” 그러는데 정말 꿈을 안고 와서 바꿔보겠다 하죠. 그러면 혼자 생각하죠, 더 좋은 계획도 있고 예산도 컸는데 박살 났었는데. 한 사업 끝나면 또 다른 사업이 시작되고 그런 식이죠. 그냥 가만히 냅둬라 싶은 거죠. 뭔가 여러 가지 일들이 있는데 그냥 그대로인 것 같아요. 1990년 12월 24일 극장을 개관하고 지금까지 30년간 월세 내면서 극장을 운영했는데, 달라진 건 없는데 모든 게 바뀌었어요. 심지어 건물주도 바뀌었어요. 세 번이나. 점점 지원금이 제작에서 중요하다 보니 이제 동료들이 경쟁자가 되어있어요. 또 계속 뭔가를 해야 해요. 극장에서 공연하고 거리에서 공연하고 다들 바빠요. 제가 제일 안 바쁜 거 같아요. 다들 바빠서 연습도 장면 장면 따로 하고. 자기 장면 연습 끝나면 또 다른 일 하러 가고.
오해룡(포스댄스컴퍼니 대표) Ⓒ엄준 제공
오해룡(포스댄스컴퍼니 대표, 이하 오해룡) : 저는 전주 토박이는 아니에요. 태어나기는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남원에서 자랐습니다. 대학은 완주에 있는 우석대학교 무용과를 다녔고 삼례에서 한 10년 살고 전주에 왔다가 부안에도 있었어요. 전주에 정착한 건 10년 정도 되었어요. 남원에는 춘향제가 있어요.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의무적으로 학생들이 가장행렬을 해요. 학교마다 장면을 맡아서 재현도 하고. 춘향제 하면 광한루 앞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여요. 길놀이는 오전에 하고 저녁에 집에 들어가야 하는데 버스는 끊기면 계속 남아서 불꽃놀이도 구경하고. 어린 시절에 춘향제는 엄청난 구경거리였죠. 중학교 3학년 때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스트릿댄스. 남원에 가면 예쁜 다리가 세 개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승사교예요. 다리 밑이 시멘트로 평평하게 되어 있어서 거기서 춤을 췄죠. 주말에 춤추면 사람들이 막 모여들어서 구경하죠. 다른 아이들도 그곳에 나와서 추는데 우리 팀이 거의 독점했죠. 막 연예인 된 것 같고 그래서 재밌었어요. 춘향문화예술회관에서도 연습했어요. 소극장 건물 앞에 공간이 있어요. 건물벽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거울처럼 비추죠. 그 유리벽을 거울삼아서 연습하는 거죠. 팔각정이나 이런 데는 뻥 뚫려서 바람도 세고, 거울도 없고 그래서 연습하기 안 좋아요. 저녁때면 춘향문화예술회관에 아무도 없죠. 그 텅 빈 곳에 애들이 한 30명이 자전거 타고 와서 춤추고, 담배 피우는 애들도 있고, 신고 들어가서 경찰 오고. 경비 아저씨도 정말 치열하게 저희 쫓아내고. (웃음) 하지만 나중에 우리 팀에 유명한 팝핀댄서도 있고 하니까 “너네 여기 대관해서 공연해” 해서 맨날 쫓겨나던 곳에서 공연했죠. (웃음) 전국댄스경연대회도 나갔는데 우리 팀이 수상은 못 했지만, 심사위원이었던 분이 무용과로 진학하라고 권유하셔서 대학에 가게 되었죠. 부모님이 걱정 많이 하셨는데 대학에 들어가니 “너도 대학교 가냐?”하며 놀라셨죠. 학교 다니면서 현대무용, 발레 등 앙상블로 여러 장르의 춤을 췄어요. 서울 댄스 스튜디오도 다니면서 뮤지컬 앙상블 오디션 뜨면 보러 다니고. 그러다가 나는 뭐 하는 사람이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2천년대 중반에 지원사업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협회나 대학 중심으로 선정되다 보니까 저는 정체성이 모호한 거예요. 무용계가 어렵더라고요. “너는 순수 예술이 아니다”라는 분도 많았어요. 순수 무용이라고 하는 경계선에서 한계를 많이 느꼈죠. 그러면서 돈 벌어서 서울 가자 했죠. 조교도 하고 아카데미도 하고. 돈을 꽤 벌긴 했는데, 번 돈으로 공연을 만들고 있는 거예요. 나만의 장르를 만들겠다, 그러면서. 그때 전주 우진문화재단에서 어린이극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이 와서 무용 기반으로 판타스틱시리즈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판타스틱정글>, <판타스틱앨리스>, <판타스틱뮤지엄>, <판타스틱아쿠아>입니다.
공연제작 판타지댄스뮤지컬 판타스틱뮤지엄 Ⓒ포스댄스컴퍼니 제공
반응이 좋아서 초청도 받고 그랬죠. 그러면서 계속 작품 만들고 전주에서 활동하게 되었죠. 또 중요한 계기가 부안문화예술회관 상주단체로 활동한 건데, 사실 처음엔 지원금 때문에 갔어요. 거기 가면 지원금이 안정적으로 나오겠구나 하고. 지원금 헌터랄까. 그런 생각으로 작업을 하니까 굉장히 힘들었어요. 자괴감도 들고. 2016년쯤이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부안의 문화유산들을 보게 된 거예요. 다 작품 소재로 보이는 거예요. 부안의 이야기로 작품을 짜고 부안 예술가들도 함께하고 어르신부터 아이까지 무대에 서고. 판이 커졌죠. 상주단체 우수사례로 선정되기도 했어요. 그 작업을 하면서 내가 어떤 틀에 갇혀있었다는 걸 깨달았죠. 내가 재밌고 즐거운 걸 하다 보면 길이 자연스럽게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지금은 우석대학교 태권도 팀과 작업하고 있어요. 태권도 아트 퍼포먼스. 부안 개섬의 도깨비 이야기를 태권도 퍼포먼스로 만들고 있어요. 지금은 꼭 서울 갈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할 게 많거든요.
내 작업에 ‘전주’가 스며들어 있다면
김소연 : 이야기 안에 전주의 여러 장소가 등장하네요. 모두 전주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입문한 계기나 작업방식이 다르고 그러다 보니 활동 장소도 다르고 그런가 하면 어느 지점에서 겹치기도 합니다. 장소를 짚으면서 이야기하니까 전주가 새롭게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앞서 각자의 활동을 입문부터 현재까지 말씀해주셨는데, 창작활동에서 중요한 계기랄까 혹은 토대와 같은 장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좌담 주제가 전주의 창작지도 그리기인 만큼 이번엔 그 장소들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꺼내주셨으면 합니다.
박규현 : 창작소극장이 있는 동문거리는 문화예술이 숨 쉬는 공간이었어요. 다른 장르 선배들, 동료들을 거기서 다 만났어요. 그렇게 만나서 서로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러다가 같이 의기투합해서 일을 벌이기도 했죠. 골목 하나, 블록 하나만 지나면 갤러리, 화실이 모여 있었죠. 블록이라고 해 봐야 몇십 미터밖에 안 돼요. 제가 2002년에 극단을 시작했는데 그때는 오래된 노포, 왱이집, 장가네왕족발, 해태바베큐 등 전주사람은 알 만한 노포 몇 개 빼고는 1층까지 다 비었었어요. 2층에 그림 그리는 형들 누나들 다 계셨고, 명태 연습실도 있었고, 극단 한울도 있었고, 우듬지도 있었죠. 그 거리 살리겠다고 동문예술축제도 만들었죠. 2003년 문화예술교육 사업 초기에는 개념도 없고 그럴 때인데 선배들 동료들과 정말 이야기 많이 했어요. 술자리에서도 하고. 그때 그렇게 치열하게 나눴던 이야기들이 저에게는 자양분이 되었죠. 그런데 재생사업이 시작되고 지가가 뛰면서 거기서 작업하던 예술가들이 가장 먼저 떠나고 지금은 저희만 남아 있어요. 동료들도 공간도 조직도 떠나고 없어졌죠. 지금은 다 먹거리 가게가 들어와 있어요. 한 500m 되나? 그 정도 되는데 이게 꽉 찼거든요. 텅 비었다가 꽉 찼다가 지금은 좀 빠지고. 저는 소극장 앞에서 오늘도 어제도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담배 피고 앉아 있었는데, 풍경은 계속 바뀌고 있는 거죠. 편도 1차로가 일방통행로로 바뀌고, 어느 날은 전부 닭꼬치 같은 거 하나씩 물고 다니다가, 한복 입고 다니다가, 갑자기 사람들이 없어졌다가, 계속 바뀌는 거죠. 우리는 계속 월세 내고 연극 만들고 있는데. 걱정되는 것은 10년 후는 또 어떤 모습일까 하는 거예요. 지원사업이 많아지면서 일을 계속하는데 그러다 보니 다들 너무 바쁜 거예요. 전주에서 연극하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몰라요. 새로 시작하는 이들과 인사도 못 나누는 것 같아요. 그러니 장르 간 협업이나 이런 것도 어렵죠. 사업만 하는 거 같고. 전주시, 전주문화재단에서 예술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다고 하던데 그런 데이터라도 공개되어 있으면 좋겠어요.
박규현(前 창작극회 대표) Ⓒ엄준 제공
송원 : 박규현 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감하면서도 놓치고 있었던 것도 있구나 싶어요. 우리 단체는 역사가 깊지 않기 때문에 선배님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지역 연극의 역사에 대해 모르는 점이 많아요. 우리 활동이 그런 콘셉트도 아니고. 또 다른 단체나 다른 분야와의 교류에 대해서도 관심이 크지 않았어요. 배우다컴퍼니는 돌봄의 가치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믿는 단체예요. 미투 등 전주 연극계에서도 여러 파고가 있었는데 그런 걸 겪으면서 명료하게 떠오른 것 같아요. “우리는 왜 함께 작업할까?”라고 질문을 했을 때, 그전에는 문장이 없었는데 나중에 보니 ‘우리는 서로를 돌보고 싶은 애정이 있구나’라고 떠오르게 된 거죠. 돌봄이라는 키워드가 어디서 나왔을까 생각해보면 그게 어쩌면 지역성이지 않을까 싶어요. 앞서 제가 어릴 때 등하굣길에 동네 어른들께 인사했다고 했잖아요. 학교에서 친구랑 싸우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동네에 들어서면 어른들이 이미 알아요. “너 오늘 누구랑 싸웠다며?” 그러시는 거예요. 제 익명성이 보장이 안 되는 환경인 거죠. 그게 너무 싫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안전하게 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일장일단이 있죠. 내가 돌봄 안에서 성장했고 나도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구나 발견하게 된 거죠. 내 작업의 장소성에서 돌봄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 작업은 대부분 자기가 어떤 인물이고, 이 인물이 사회에서 어떻게 소통하고 싶은가를 얘기하는 작품이에요. 공동 창작을 지향하고 있고. 예술적 성취도 중요한 가치지만,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이 작업을 하는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계속 질문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중요했어요. 앞서 코로나19 때 어려웠던 상황을 이야기하셨는데, 저희 같은 젊은 단체에는 도리어 기회였어요. 극장을 가지고 있거나 극장을 쓰는 것이 용이한 단체에 맞추어진 사업이 아니라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 지원사업이 나오기 시작한 거예요. 가능하면 극장에 사람이 안 모이게 하는 지원사업들이 도리어 저희 같은 단체들에는 여러 가지를 해볼 기회가 된 거죠. 오히려 저희에게 극장은 늘 눈치 보는 곳이었어요. 해도 되는 것,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정해져 있고 그런 규정들을 잘 따라야 하는 곳이죠.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얘기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많은 규칙이 있고, 코로나19 때는 더 많은 규칙을 지켜야 했죠. 그래서 옥상을 찾게 된 것 같아요. 단체에서 서로를 돌보는 과정에서 대화하면서 찾은 키워드죠. 또 옥상을 선택한 건 유료 공연이라 그래요. (웃음) 개방적이면서 경계가 있는 곳. 극 중간에 관객과 같이 하늘을 보면서 노래하는 장면이 있어요. 우리 공연의 가장 중요한 무대 배경은 하늘이다. 이런 것을 서로 감각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원도심에서 옥상을 찾는 데 너무 노후화되어서 위험하다든가 너무 좁다든가 공간은 적당한데 건물주가 허락을 안 해주신다든가 해서 장소 찾기가 어렵더라고요.
제2회 구도심 옥상극장 <관객입장 10분 전 입니다> Ⓒ배우다컴퍼니 제공
김형택 : 저는 가끔 왜 아직도 전주에 있냐, 왜 올라오지 않느냐, 전주에서 공연도 별로 없지 않냐는 질문을 받아요. 전주 공연은 1년에 한두 번이거든요. 거의 서울이나 경기도 쪽에서 많이 하죠. 저는 이렇게 답을 해요. 전주가 집이라서. 전주 토박이고 가족들도 다 여기 있어요. 활동하는데 딱히 불편한 것도 없어요. 부산, 인천, 서울 어디를 가도 딱 중간이어서 2시간 반 3시간이면 가요. 전주가 딱 중간이에요. 작업을 보면 크게 두 가지거든요. 곡 쓰는 거하고 연습하는 거. 녹음은 전주에서 할 수도 있고, 서울에서 할 수도 있고. 곡 쓰는 작업이 제일 시간이 많이 드는데, 곡은 거의 집에서 쓰거든요. 곡을 쓰는 건 혼자 하는 작업이니까. 집에서 새벽에 그냥 생각나는 대로 계속 꾸준히 쓰죠. 집에서 쓰다가 힘들면 저희 집이 천변 근처인데 천변 걷고, 덕진공원도 걷고, 아니면 카페 가서 쉬고 오고. 이렇게 작업해요. 그래서 딱히 어디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다른 도시에 가면 거기는 내 집 같지 않아요. 여기서 계속 살아왔으니까 전주는 되게 편해요. 고니아가 기타, 베이스, 그리고 지금 장구 이렇게 셋인데, 저는 전주에 살고 베이스시트는 전주에 있다가 논산으로 이사 갔고 장구재비는 수원에 있어요. 보컬리스트는 서울에 있고. 연습할 때는 논산에서 해요. 딱 중간이거든요. 연고지는 전주니까 다들 전주팀으로 알고 있지만 팀원들이 사는 곳은 다 달라요. 전주의 장소성이 우리 음악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있다고 생각해요. 스며드는 게 있죠. 고등학교 때 친구들하고 밴드를 만들어서 음악을 했던 게 여기기도 하고, 서울 빼고 음악 하는 친구들이 많은 데가 전주예요. 광주, 부산보다 많아요. 동문거리 이야기하셨는데 음악 하는 사람들, 시 쓰는 사람들,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특이하게 많아요. 음악 하는 데도 쉽게 접할 수 있고. 고등학교 때도 밴드 하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대학교마다 다 밴드가 있었고, 음악 동아리가 있었어요. 연극동아리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저의 음악에 그런 바탕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형택(고니아 대표) Ⓒ엄준 제공
오해룡 : 전주에서 활동하다 보니 전라북도 지역 곳곳과 연결되는 것 같아요. 무주, 고창, 진안 등등을 가면 이제 다른 것들이 보여요. 격포 수성당, 계란골, 칠산바다, 위도 등등 다 이야기가 넘쳐요. 여기부터 진도까지 엄청난 어장이잖아요? 그러니까 얼마나 바쁘겠어요. 사람들이 말하는 게 막 화내는 것 같아요. 바쁘니까. 펄떡펄떡 뛰는 에너지가 느껴지죠. 격포항에 가서 그물 펼치시는 거 보면 춤이 막 떠올라요. 그래서 춤으로 만들었잖아요. 어르신들 보고 “조기떼다” 하면서 객석으로 내려가면 좋아하시죠. 아이들에게 “너네는 산호초야, 너네는 팔딱팔딱 뛰는 물고기야” 그렇게 공연을 만들면 자기가 사는 곳의 이야기고 또 자기 아이들이 공연하니까 좋아하죠. 구전되어온 노래도 새로운 버전으로 편곡해서 써요. 익숙하면서도 새롭죠. 제가 남원에서 자랐잖아요. 옛날엔 남천교 천변에서 명창들이 노래 부르면 그 천변이 꽉 찼대요. 사람들이 모이니까 장도 서고. 거기서 판소리 다섯 마당으로 스트릿댄스를 하면 어떨까? 태권도 퍼포먼스도 같이 하면 좋겠네? 그렇게 시작하는 거죠. 또 전주에서 태조퍼레이드, 비빔퍼레이드를 만들었어요. 전주에 온 분들이 맛집에 줄 서 있는데 춤도 추는 거죠. 춤추고 SNS에 올리고. 그러면 더 재밌잖아요. 재미있게 할 것들이 많아요.
지역문화소재 전주태조퍼레이드 | 지역문화소재 전주비빔 해외 초청 싱가포르 칭게이축제 Ⓒ포스댄스컴퍼니 제공
삶과 예술로 전주를 그리기
김소연 : 오늘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저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나’로부터 이야기하니까 더 깊고 넓은 이야기가 나온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계속 장소들을 저 혼자 떠올렸어요. 전주 원도심 낡은 건물, 동문예술거리, 천변과 덕진공원, 남원 춘향문화예술회관 소극장 유리벽, 부안의 바닷가 등등. 또 고니아가 공연할 모로코와 칠레도 떠올렸어요. 제가 가본 곳도 있고, 처음 듣는 장소도 있지만 계속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전주의 창작지도 그리기’라는 주제로 장소에 대한 질문을 던졌는데 여러분의 말씀을 듣다 보니 삶과 예술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생하게 듣게 된 것 같습니다. 삶과 예술이야말로 창작자들에게는 시작이자 끝인 질문들이죠. ‘지역’이라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각자의 고유명사로 전주의 예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