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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1) 사실이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세계에 관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또 뭐가 있을까?

모르는 데에는 두 가지 나쁜 경향이 있다. 잘못 알기, 그리고 무시하기. 잘못 알기와 무시하기는 사실 한 가지로 보일 때가 많다. 고의적으로 잘못 알려는 경향 때문인데, 그런 경향은 ‘중심주의’와 관련이 있다. 예를 들면, 서양 백인 남성 과학 중심주의.

보편타당한 논리나 이론은 전주보다는 서울에 있고, 서울보다는 서양 어느 곳에 있는 걸까?2)

《온전》 9호는 이 세계 안에 있지만 잘 드러나지 못한, 다른 세계3)의 가능성을 찾는 데 능한 예술에 관해 말을 꺼내 본다.

 




제9호 기획 좌담  Ⓒ이평원 제공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대리사회》는 읽어 보진 않았어도 누구나 들어 본 제목의 책이다. ‘지방시’란 줄임말로 잘 알려진 그의 고백 이후 ‘시간강사’란 말은 사라졌고, 《대리사회》란 선언 이후 우리 사회는 배달사회가 되었다. 그리고 김민섭은 “필연적으로 제안이라는 새로운 영역”4)에 도달해 글과 말과 실천을 내놓고 있는데, 작가 장강명이 정의내리길 ‘선량한 르포’라고 한 김민섭의 저작은 예술적으로 독창적이다. 지금은 자기가 중심이 되는 삶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가족과 함께 강릉으로 이주해 서점 ‘당신의 강릉’을 열었다.


지난해 개봉한 〈태어나길 잘했어〉는 최진영의 첫 장편영화다. 영화는 여러 국내외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오사카아시안영화제 재능상을 받았다. 그런데 스스로 감독이라고 말해 본 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럼 뭐라고? 종종 비정규직 영화 노동자라고 말하며, 넘어야 할 허들을 넘으며, 두 편의 영화와 한 편의 드라마를 계획하고 준비 중이며, 인터뷰에서 종종 지그문트 바우만을 인용하는 사회학 전공자(영화를 전공하지 않았다)답게 시위와 연대로 사회에 적극 간섭한다. 그냥 영화감독이 아니라 남다른 영화감독이 되려는 걸까?


《우리의 첫 미술사 수업》을 세상에 내놓기 전 강은주는 잠시 망설였다. 학/술/적 글쓰기가 아니라는 이유에서. 하지만 마침내 이 책은 강은주의 첫 단독 저서이자 (믿기지 않겠지만) 한국의 첫 페미니즘 미술사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다시 김민섭으로 돌아가 《지방시》는 김민섭의 첫 책이다. ‘시간강사’ 문제를 처음으로 폭로한 이 책을 낼 때 그는 본명 대신 ‘309동 1201호’란 필명을 썼다.


첫 책 《지방시》에 대해 부족한 자신을 알기 위해 썼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모름’과 ‘앎’ 사이의 어떤 풍부함이 그 이후 작가로서 10여 권의 다작으로 이어지게 했을까요?


김민섭 : “많은 분들이 그 책을 두고 대학의 현실을 폭로했다고 평가하시는데, 저는 그런 생각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그걸 폭로라고 할 수 있을까요? 폭로라는 건 뭐랄까, 누구나 겪는 게 아니라 나 홀로 겪고 있는 부당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겠죠. 이건 제가 지방대를 다니긴 했지만 서울대든 어떤 명문대든 그 모두가 우리나라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면 모두 겪고 있는 일이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걸 폭로나 고발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냥 고백이라 생각하고 썼습니다. 큰 문제가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반향이 컸어요.”


“대한민국에 대학이 생긴 지 100년이 됐는데 그동안 교수들이 쓴 회고록은 꽤 많아요. 내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 건 많은데 중간 단계에 있는 시간 강사라든지 대학원생이라든지 그 사람들이 쓰는 글은 논문밖에 없는 거예요. 다른 글은 없어요. 누군가가 썼겠지 하고 찾아봤더니 죽기 전에 쓴 유서 말고는 시간강사들이 뭔가 쓴 게 없더라고요. 왜 우리의 삶이 보여진다라는 것이 유서, 죽기 전의 고백이나 고발 이런 것밖에 없나 싶어요. 지금 돌아보면 우리가 어떤 것을 찾아내고 고발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보여지지 않는 것들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제가 지금 쓰고 있는 글들은 거의 그런 것 같아요. 우리 모두 알고 있지만 잘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 그 이후에 썼던 글들도 그 연장선에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쓸 게 많아요. 이제 모두가 아는 걸 쓰는 거니까.”


폭로/고발과 다른 글을 만드는 전략이나 방법이 있다면?


김민섭 : “폭로를 하려면 경찰서에 가야죠. 폭로를 한다라는 건 이 사람이 횡령을 했다, 이 교수가 우리한테 연구비를 안 줬다, 이런 건 경찰과 방송에서 다룰 문제죠. 그것이 아니라 어떤 관행과 문화, 우리가 깨뜨려야 할 어떤 제도나 문화라면, 그런 것들은 우리가 열심히 드러내는 것으로 고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람들에게 그냥 우리가 힘들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변화의 첫걸음은 공감이었다.


“사람들에게 제 경험을 이야기를 했어요. ‘내가 혼인 신고를 못하고 결혼했어.’라는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혼인신고를 왜 못해?’라고 묻죠. 내가 ‘대학에서는 직장건강보험 가입이 안 된다고 하고, 그때 내 월급이 80만 원인데 혼인신고까지 하면 지역건강보험 가입을 해야 하는데 한 달에 10만 원이 넘게 들어서 못했어.’ 그러면 사람들이 그때부터는 공감하고 반응합니다. ‘왜 대학이 시간강사들한테 건강보험도 안 해줘. 너네 이 정도였어?’ 아이가 태어났고 제가 혼인신고를 하고 그래야 출생신고를 하겠죠? 그러면서 맥도날드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맥도날드는 내가 주 50시간을 일해 주면 건강보험을 해줬으니까. 그러면 사람들이 ‘시간강사가 혼인신고도 못해서 맥도날드에서 물류 상하차 아르바이트하면서 강의 다니는, 그럴 정도였어?’ 이런 공감대가 만들어진 거죠. 저의 전략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이야기, 그 안에 들어가서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무언가를 서사적으로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 서사에 진실성이 있다면 뒷짐 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한 발 다가와 ‘이 정도인줄 몰랐어.’ ‘이건 바뀌어야 해.”라고 인식해 주신다면, 그때 변화가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2015) | 《대리사회》(2016)  Ⓒ김민섭 제공



부당함을 다루는 예술적 전략


《지방시》를 막 출간한 김민섭을 찾아온 수많은 ‘지방시’ 중에는 10년 가까이 시간강사법을 위해 천막 농성을 하던 부부가 있었다.


“부끄럽게도, 시간강사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지 않았을 뿐 어떤 이들의 몸짓으로 계속되어 왔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그분들께서 ‘우리가 10년 투쟁한 것보다 네 책 한 권이 더 많을 걸 바꾸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자신들은 계속 투쟁할 테니 저에게는 계속 책을 써 달라고 당부하셨어요. 핵심은 뭔가 보여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런 행위가 투쟁이라는 단어 하나로 수렴될 수 없다는 거예요. 투쟁의 안쪽으로 들어가서 그동안 보여지지 않았던 것을 섬세하게 잘 드러내는 것이 어쩌면 좀 더 확실하게 뭔가를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전략이었던 것 같습니다.”


김민섭 작가는 저널리즘이나 투쟁이 아닌 어떤 활동을 하는 걸까요?


김민섭 : “두 번째 책 《대리사회》에 대해 장강명 작가가 ‘선량한 르포’라고 정의해 주셨어요. 이 르포는 그냥 담담하게 읽히고 사람들의 생각을 좀 바꾼다, 라고요. 저도 제 글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잘 몰랐는데, 장강명 작가님의 말씀을 감사히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최진영 감독님의 작품 활동도 주인공 같지 않은 평범한 인물들이 조명된다는 면에서 ‘선량한 르포’인 것 같습니다.


최진영 : “저 역시 여성으로서 또 지방에 사는 창작자로서 넘어야 할 것들이 정말 많아요. 그런 허들에 대해 그동안 가시적으로 공적으로 발화된 경우들이 없지 않아요. 그런데 주류 미디어나 상업영화만 보면 다 서울 살고, 예쁘고, 본부장님이죠. 거기에 들지 못하면 정상성 범주 밖에 있는 것처럼요. 그래서 저는 정말 제가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내가 보고 체험한 것들을 작품에 넣어야겠다, 그게 나의 책무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래서 〈태어나길 잘했어〉 같은 영화와 저의 단편들이 나온 것 같습니다. 진짜 사람들을 위협하는 부당함이 공기처럼 흔하지만, 그걸 어떤 방식으로 작품에 녹여 낼지에 대해 지금도 공부 중이고 항상 고민 중이에요.”


          
〈태어나길 잘했어〉 포스터  Ⓒ최진영 제공


          
〈태어나길 잘했어〉 스틸 컷  Ⓒ최진영 제공


전주 배경의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에는 영화의 주인공 같지 않은 사람들이 나온다고 느껴진다. 자연스런 연기를 부르는 대사가 의미와 재미를 이끄는 특별한 영화다.

김민섭에게 실제 벌어진 일은 마치 최진영이 만든 영화 같다. 고대하던 생애 첫 해외여행 날과 아들의 수술 일정이 겹친 김민섭은 비행기 티켓을 취소하는 대신 (그러면 환불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대한민국의 다른 김민섭을 찾아 티켓을 양도하기로 한다. 그 유명한 ‘김민섭 찾기 프로젝트’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김민섭을 찾은 것은 물론 여행 경비까지 모이고, 이어 ‘당신이 잘되면 좋겠다’는 뜻의 후원이 크게 이어졌다.


김민섭 님은 대학이라는 중심에서 벗어나며 작가가 되었는데, 최근에 서울을 떠나 강릉으로 이주한 것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김민섭 : “저는 브랜드를 중시하는 사람이에요. ‘나 서울 사람이야.’ ‘나 어느 대학에서 강의해.’ 같은 거죠.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대학을 떠나고 대리운전을 하고 책을 기획하고 ‘김민섭 찾기 프로젝트’ 등 많은 경험이 영향을 미쳐 저의 생각을 좀 바꾸게 된 것 같습니다. 강릉으로 가면서는 ‘나는 노트북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잘 살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어요. 중심과 주변부가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어디든 중요한 건 나의 자립이죠. 자립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 중심이 되고 주변과도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중심에서 벗어나기


강은주 선생님이 연구하고 가르치는 ‘페미니즘 예술사’의 현재 위치는 어디인가요?


강은주 : “저는 미술학자가 아니라 미술사학자입니다. 미술로 역사를 탐구하는 역사학자인 거죠. 오늘 이 자리에 모인 김민섭 작가, 최진영 감독, 그리고 저의 공통점이라면 ‘미시사’에 대한 관심일 겁니다. 미시사는 잘 적혀지지 않은 것들이에요. 주류 역사는 모두 권력자들의 서술이잖아요? 그런 거시사 체계는 미술사에서도 그대로 쓰여집니다. 페미니즘 미술사는 50년 역사의 학문인데 여전히 주변일 뿐입니다.”


《우리의 첫 미술사 수업》은 보기 드문 페미니즘 미술사 대중서입니다.


강은주 : “학계에선 린다 노클린이나 휘트니 채드윅의 페미니즘 미술 연구와 미술사를 다 알고 있죠. 그런데 내가 이 얘기를 왜 해야 할까? 김민섭 작가님의 《지방시》로 공감을 이끌어 냈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파장(resonance)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대중적인 필체의 결과물이 나와서 일으킬 파장을 기대했습니다.”


강은주는 이화여대에 ‘여성과 예술’ 강의를 개설해 10년 이상 이어오고 있다. 한 학기 수강생은 200명, 매년 학생들이 손꼽는 우수 강의로서 ‘인생 강의’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우리의 첫 미술사 수업》은 이 강의를 책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페미니즘 미술사 강의가 한국엔 이화여대에만 개설되어 있다니 놀랍습니다.


강은주 : “강사들은 강의 하나로 생계가 안 되기 때문에 저도 여러 대학에 출강합니다. 비록 페미니즘 미술사는 아니지만, 한양대 같은 경우 현대미술 교양 강의에도 공대 남학생들 비중이 높습니다. 한번은 리포트 주제로 ‘사회를 반영하는 미술’을 내 주었는데, 굉장히 많은 학생들이 저의 책을 읽고 쓴 리포트를 제출했어요. 저는 정말 감동을 받았죠.”


학점을 노린 게 아닐까요?


강은주 : “제가 페미니즘 미술사 책을 내면서 기대한 것중 하나로, 오해를 바로잡고 싶었어요. 미술사학자로서 지난 반세기 동안 페미니스트 미술의 흐름을 보면 페미니즘은 소외를 조명해 왔다는 걸 알 수 있어요. 1970년대에 급진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주장한 페미니즘은 10년 정도 유행했고, 80년대부터 페미니스트 미술은 인종, 성소수자, 불평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중시하고, 그 문제점을 해결할 때 비로소 온전하게 여성의 권리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페미니스트 미술의 본질이에요. 제 강의를 들은 남학생들도 스스로를 기득권자라고 생각하진 않을 거예요.”


페미니즘 정치, 사회학, 투쟁과 다른 페미니즘 예술만의 호소력이나 강점이 있다면?


강은주 : “사회적인 페미니즘 이슈가 투쟁과 대립으로 흐르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대립 관계에서 주체와 타자를 나누는 문제가 지나치게 부각되어 버리죠. 그런데 우리는 누구나 어느 순간 주체가 될 수 있어요. 페미니스트 미술은 지난 50년 동안 모두를 주체로 참여시키는 작업을 실천해 왔어요. 최진영 감독, 김민섭 작가 같은 예술가들은 사회적 이슈를 흥분이나 공격의 콘텐츠로 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에 거리와 시간을 두고 예민한 눈으로 성찰해 어떻게, 어떤 맥락에 위치시켜야 하는가를 심도 있게 고민하는 이들이 예술가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술은 넓게 보면 인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에 대해 고민하고 삶이 궁극적으로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보여주기 위한 가장 세련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예술가들이죠. 미술계에서는 페미니스트 미술가들이 지난 50년 동안 가장 적극적으로 시대를 고민하고 방향을 제시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첫 미술사 수업〉  Ⓒ강은주 제공


이화여대 교양강좌 '여성과 예술'은 25년째 이어져 왔고,
지난 10년간 이 강좌를 발전시킨 강은주는 〈우리의 첫 미술사 수업〉 출간으로 강좌의 외연을 확장시켰다.  Ⓒ이대학보 제공



고백, 선언, 제안, 실천


한국에선 1990년대에 페미니즘이 주목을 받았고, 자연스럽게 발전하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만, 제가 느끼기에 차별과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시스템이나 인식이 크게 나아져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김민섭 작가의 고백, 선언 이후를 주목하게 됩니다.


김민섭 : “자기 이야기를 드러낸 사람들이 한 발 나아가게 되면 어떤 규정을 하고 선언하는 단계로 나아가더라고요. 거기까지는 잘 가는데, 계속해서 어떤 선언만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라는 물음표에서 시작한 ‘나는 괜찮은가?’라는 책이 《지방시》라는 책이었고. 그리고 ‘우리들은 어떠한가?’라는 선언으로 나아갔던 게 《대리 사회》라는 책이었고. 그렇다면 이제 어떤 시대를 보고 싶었어요. 한 시대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 시대에 무엇으로 규정하고 통제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바라봐야 할 것인가, 무엇을 직시해야 할 것인가라고 할 때 제가 생각한 건 역시 모두가 알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것인 언어였어요. 여기저기에 사람들을 규정하고, 통제하고, 가르치려는 욕망을 가진 언어 같은 것들이 많이 있다는 거죠. 결국 그런 게 ‘훈’이 아닐까 생각해서 그 훈이라는 언어를 찾기 시작한 게 《훈의 시대》라는 책이었고. 거기서는 제안을 좀 해보고 싶었어요.”


‘그러나 고백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고 하셨어요.


김민섭 : “고백을 하는 데 그친다는 것은 거기에 공감한 사람들의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거라 생각해요. 그리고 선언의 반복도 그렇고요. 결국 이 사회를 향한 건강한 메시지를 던져야 하는 게 뭐냐, 라는 데 착안해서, 우리가 알고 있지만 드러내지 않은 것들을 열심히 찾아다니면서 그런 것들을 써보자고 했습니다. 그런 걸 찾는 방법이 뭔가라고 하면 그냥 내가 잘 살아가는 것. 그냥 하루하루 그냥 살아가는 날들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쓸 게 없어요. 그런데 내가 오늘 하루를 잘 살았구나, 좋은 사람으로 살았구나, 무언가 물음표를 만들어 내면서 답하고 살았구나, 하는 날들은 쓰고 싶은 게 생겨서 앉아서 쓰게 되는 날들이 있거든요. 이제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내가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는가? 저야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르포 같은 글을 쓰려는 사람이니까, 저에겐 그런 게 중요하더라고요.”



김민섭(작가,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 저자, 서점 당신의강릉 대표)  Ⓒ이평원 제공


최진영 : “영화의 프레임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소외된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그들을 어떻게 포함시킬 것인가? 운동장(프레임)을 넓히면 되잖아요. 요즘 저는 전주에서 창작자 모드보다 활동가 모드로 사는 비중이 더 커요. 맨날 집회 나갑니다.”


최진영은 전주천의 버드나무 추모제 참여와 세월호, 그리고 주말 서울에서 있었던 국제도서전의 블랙리스트 항의 시위를 화제에 올렸다. 그의 삶과 앎과 창작은 세상과 넓게 연결 중이었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빛깔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를 만든다.


최진영 : “〈태어나길 잘했어〉는 저의 자존감 회복 프로젝트이기도 했어요. 자존감을 좀 더 획득하자, 비대한 자아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을 너무 채찍질하지 말자라는 의미로서, 말하자면 저 자신으로 수렴하는 영화였거든요. 이 영화의 주인공에겐 다한증이 있어요. 그런데 영화를 본 (다한증이 있는) 분들에게 정말 많은 공감의 메시지들을 받았어요. 그냥 나를 생각하며 수렴하는 영화 한 편이었는데, 이렇게 연결이 될 수가 있구나…. 다양한 회로로 연결되어 있는 사회를 본 것 같고, 다음 영화부터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만드는 영화를 지향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태어나길 잘했어〉에 홈리스가 나오는데, 저는 홈리스행동이라는 단체를 후원하고 있기도 해요. 그 분들은 홈리스로 뭉뚱그릴 수 없는 다채로운 빛깔의 사람들이에요. 이전까지는 빨주노초파남보라고만 생각했는데 빨간색과 주황색 사이에도 얼마나 많은 스펙트럼이 존재해요? 우리가 실험영화나 독립영화에서만이 아니라 상업영화에서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라면 좀 더 해 봐도 되겠다고 생각해요. 저는 사회학을 공부했고, 20대 때는 노동운동하는 친구들과 단체를 결성해 활동하기도 했죠. 이제 마흔이 된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저는 일단 전주라는 영화판 안에 들어와 있으니 후배들을 좀 더 끌어올려 주고 싶고요. 판을 넓히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있어요. 그냥 평범하게 그려졌던 사람들을 다르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하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최진영(영화감독, 〈태어나길 잘했어〉 연출)  Ⓒ이평원 제공


〈연희동〉, 〈낙원동〉 같은 단편영화들, 그리고 전주의 용도가 사라진 장소들을 아카이빙하는 작업도 하셨어요. 기록과 관련된 작업들로 보입니다.


최진영 : “2015년부터 구도청, 카세트테이프 공장, 다음으로 전주 시청 앞의 대규모 성매매촌인 선미촌을 기록했습니다. 그 장소들의 다양한 맥락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지 못한, 냉정히 말하자면 실패한 작업입니다. 아무튼 사라진 공간들을 기록하는 게 좋았고. 〈태어나길 잘했어〉에 거의 70% 나오는 집이 있는데 그 집이 최근에 철거가 됐어요. 그 집하고 바로 앞에 〈스물다섯 스물하나〉 백이진 집도 같이 철거가…. 근데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것들이 계속 사라지는 기분이 되게 묘하더라고요. 제 영화에 나오는 동물원도 그 이후 시설 노후화로 운영정지가 되었어요.”


김민섭 : “앞으론 사라져야 할 것들을 영화로 만드시죠.”



기울어진 운동장


놀랍게도 임순례 감독이 한국의 여섯 번째 여성 영화감독입니다.


최진영 :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감독님이 아이를 업고 현장에서 메가폰을 잡고 계신 사진이 있어요. 그걸 재조명한 영화가 최근에 신수원 감독의 〈오마주〉인데 꼭 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지금 독립영화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나 전주국제영화제 등 우리나라 큰 영화제들만 봐도 한국 장편 경쟁 부문에 여성 감독 비율이 정말 커요. 해외 영화제 수상도 정말 많이 하죠. 사업 장편영화 쪽과 대조적이게도요.”


문학 작가도 여성 작가들의 활약이 많고 돋보입니다.


김민섭 : “비율이 훨씬 높죠.”


최진영 : “독립영화 안에서는 비율도 높고 수상 실적도 좋습니다. 그런데 상업영화로 못 나가요.”


상업영화는 상업성을 보고 결정하는 게 아닐까요?


최진영 : “흥행 중인 〈범죄 도시〉는 남성 영화죠. 그런 상업영화를 남성 감독들이 만듭니다. 허들의 문제보다 더 한 문제는 다양성의 축소입니다. 여성 관객들이 보고 싶은 영화가 〈범죄 도시〉만은 아닐 겁니다. 우리가 다양한 영화를 선택할 권리가 좁아진다는 건, 정말 젠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영화계의 성평등에 대해 지속적으로 발언하고 있는데요. 왜 독립영화의 여성 감독들이 상업영화계로 넘어오지 못하는지에 대해 다층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고 봐요.”


“투자자들의 〈범죄 도시〉류의 장르 편식이 있습니다. 상업영화의 등장인물들인 조폭, 경찰, 검사… 주변에 있나요? 지금 한국 영화가 관객을 바보로 만들고 있어요. 다양한 세상을 축소시킵니다. 하지만 독립영화에서 그려지는 인물들은 그렇게 협소하지 않아요.”


앞서 말한 문학 분야뿐 아니라 영화/드라마도 여성 작가들의 히트작이 두드러집니다.


김민섭 : “그런데 출판계도 학술 쪽으로 가면 다 남자예요. 인문/사회 쪽에선 1등부터 10등까지 거의 다 남자고 가끔 페미니즘 테마의 여성 저자가 보이는 정도죠.”


강은주 : “미술계 내부의 여성 비중은 많이 높아졌어요. 미술관 관장도 많이 맡고 있죠. 그러니 미술계 안에서 젠더 평등을 논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작년에 페미니스트 미술가 윤석남 선생님과 대담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여전히 존재하는 미술계 내의 젠더 불평등을 지적하셨어요. 양적 팽창이 질적인 팽창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죠. 여전히 출산휴가를 쓸 수 없는 학예사, 경력 단절로 10년 이상 작업을 할 수 없는 여성 미술가들이 전시 초청을 못 받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데 어떻게 젠더 평등이 충분히 이뤄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강은주(미술사학자, 《우리의 첫 미술사 수업》 저자)  Ⓒ이평원 제공



지금 내 자리에서 하고 싶은 나의 예술


김민섭 : “서점 이름을 ‘당신의 강릉’이라고 지었습니다. 강릉이라는 도시엔 바다가 있고, 바다란 누구의 것도 아닌 공공재 같은 존재인 것 같아요. 강릉을 찾는 모든 분들이 ‘저건 내 거야’라는 생각으로 오시기에 권력이나 위계도 흐려지고, 누구나 주인이 되는 거죠. 강릉이란 그런 곳이란 이야기를 서점 이름으로 표현해 보았습니다.”


“자립할 수 있는 조건은 다정함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국 저는 문학이라는 것도 동정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같을 동과 정 정자를 쓰기 때문에 누군가와 같은 정이 되는 일, 타인의 마음이 되어 보는 일을 동정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제 누군가의 마음이 되어보는 일이 중요하지만 결국 나의 마음이 되어보는 일을 많이 한 사람,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던 사람들은 이제 자립할 수 있고 타인들이 조금 더 눈에 들어오게 되죠. 자신을 동정하고, 그걸 기반으로 다른 사람을 동정하고. 근데 거기서 끝나면 안 되고 좀 더 나아간다면 인간이 아닌 것을 동정해 보는 그런 연습을 함께 할 때 그런 사람들이 다정하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여러 곳에 나의 정을 보내는 사람들.”


최진영 : “〈스즈메의 문단속〉을 엔드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인상적으로 봤어요. 친구들이랑 영화관을 나오며 다정함이 세상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런데 요새 다정함이라는 말이 진짜 많이 들려요.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한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에서도 그런 다정함을 보았고요.”


강은주 : “얼마 전 한 학생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디즈니랜드에서 실사화한 〈인어공주〉 영화에서 흑인배우를 주인공으로 선택한 것을 두고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일명 pc주의)’을 지나치게 강요한 나머지 예술성을 훼손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는데, 이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하냐는 물음이었죠. ‘정치적 올바름’이란 1960년대 이후 미국에서 인종, 민족, 종교, 젠더에 있어서 어떠한 차별이나 편견이 섞인 표현을 쓰지 말자는 의미에서 사용된 용어예요. 흑인 인어공주에 대해 미국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뜨거운 비판이 있었다는 이야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더군요. 우리가 머리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일상 속에 수용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주는 사례이죠. 인어공주는 흑인일수도 동양인일수도 또는 성소수자일수도 있어요. 이 캐릭터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한계를 뛰어넘어 진정한 사랑을 이루고자 용기를 내는 인간이라는 것이죠. ‘정치적 올바름’을 지키려는 노력이 예술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발상은 논리적이지 않아요. 이것은 마치 1980년대 민중미술에 대해 일부 비평가들이 예술성을 문제 삼았던 일을 상기시키더군요. 제가 페미니즘 미술사를 연구하고 강의하는 이유는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 사이에서 발생하는 간극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아는 ‘정치적 올바름’이 예술과 조화를 이루는 사례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업이죠. 이 간극을 줄여나가는데 김민섭 작가님과 최진영 감독님이 말씀하시는 다정함이 선한 영향을 주리라고 봐요.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땅히 실천하려면 우리는 타인에게, 주변인에게 좀 더 다정할 필요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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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곰출판, 2021

2) ‘트랜스로컬 감성총서’ 서문에서,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HK+2 감성인문학연구단

3) “다른 세계는 있지만, 그것은 이 세계 안에 있다.”, W. B. 예이츠

4) 《훈의 시대》, 김민섭, 미래엔, 2018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대리 사회 #공감 #선량한 르포 #우리의 첫 미술사 수업 #페미니즘 예술사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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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강은주
강은주는 현재 미술사학자,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으로 학사를, 같은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청주공예비엔날레 전시팀장, 경기문화재단 학예사,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원 등으로 일하며 다양한 전시를 기획했다. 지금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재학생과 졸업생의 인생수업으로 불리는 교양수업 <여성과 예술>를 강의하며, 페미니즘 미술사 및 현대미술과 대중문화의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최근 논문으로 「영국 인디펜던트 그룹의 전시에 나타난 사회적 소통의식」이 있으며, 저서로는 『현대미술, 현실을 말하다』(공저, 2016), 『우리의 첫 미술사 수업-평등한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관점을 배우다』(2022)가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외에 성신여자대학교와 한양대학교,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supremus_ejkang
[이메일] winnygree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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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김민섭
김민섭은 작가이고 1인출판사 정미소와 독립서점 당신의 강릉을 운영하고 있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2015)를 시작으로 <대리사회>(2016), <훈의 시대>(2018), 그 이후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2021)에 이르기까지, 개인과 사회와 시대를 조망하는 다감한 르포를 써 오고 있다. 사회적 실험이라고 할 만한 이야기를 만들고 확장시키는 데 관심이 있다.
[인스타그램] @309_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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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최진영
최진영은 1983년 전주 출생으로 사회학을 전공한 후 전주에서 꾸준히 장·단편 영화 제작뿐 아니라 <구도청 철거>, <팔복예술공장>, <선미촌>과 같은 변화하는 공간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했다. 2022년 4월에 개봉한 장편 <태어나길 잘했어>가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캐나다 판타지아국제영화제 등에서 선보였으며 오사카아시아영화제에서 재능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전북독립영화제 이사로 활동하며 영화제 연간지 제작과 새 작품 기획 단계에 있다.
[이메일] madamtou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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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조용범
조용범은 출판 편집자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IT 및 출판 분야에서 여러 가지 콘텐츠 만드는 일을 하다가 2018년 출판사 에이치비 프레스를 열어 책을 만든다. 에이치비 프레스는 마치 HB 연필처럼 흔히 쓰이길 바라며 조화와 균형을 지향하는 출판사다. 매체에 구애받지 않는 흥미롭고 쓸모있는 콘텐츠를 만들려고 하며, 그중 종이책을 가장 잘 만들고자 한다. 첫 책은 박찬용 작가의 《요즘 브랜드》(2018년 11월)고, 최근작은 소피 하워스의 《마인드풀 포토그래퍼》(2024년 4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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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최아현
최아현은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등단하고, 전주에서 소설가로 활동하며 계속해서 기록하는 삶을 꿈꾸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쉽게 지나치는 것들을 기록하고 소설에 옮긴다. 단편소설 「독립」과 「대원의 소원」을 발표했다.
[이메일] ahyoun091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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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웹진 《온전》 편집부
[이메일] jjcf_run927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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